최상현 주필 

 
영화 몬도가네(Mondo Cane)는 1960년대에 한국에 들어와 흥행에 성공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우리 식으로 몬도가네라고 발음하지만 원음에 충실한 발음은 ‘몬도 카네’가 아닌가 싶다. 그 뜻은 ‘개의 삶(A Dog's Life)’이다. 한국에서는 ‘개 같은 세상’으로 번역되어 널리 쓰인다. 영화는 문명 속에 도사린 인간의 야만성을 들추어내고 있다. 그 내용들은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고 엽기적이다. 흔히 말하는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는 놀라움을 전달한다.

북한에서 권력 2인자라 하던 장성택의 죽음은 몬도가네 영화보다도 더 엽기적이다. 짐승의 죽음도 그렇게 험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는 북한의 특별 군사 법정에서 간단한 심문과 형 선고의 요식적 절차를 마치고 한 마리의 짐승이 우리에서 끌리어 나오듯 형장으로 끌려가 즉시 처형되었다. 그에게는 기관총이 난사된 데다가 그나마 화염방사기로 태워졌다는 얘기가 나돈다. 이는 북한 체제의 잔인함을 웅변한다.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법정에서 한 마디의 항변도 할 수 없었다.

그에 앞서 장성택은 그가 멘토(Mentor)로서 그의 뒤를 받쳐주던 북한의 젊은 최고 권력자 김정은이 주재한 공산당 정치국 회의장에 끌려나와 집중적인 성토를 받고 구금됐었다. 이는 김정은의 ‘친국(親鞫)’이나 다름이 없었다. 황제나 임금이 중죄인을 직접 심문하고 고문을 가하는 것이 ‘친국’이다. 김정은은 북한 왕조의 임금이며 동시에 장성택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포악한 참주(僭主)다. ‘친국’은 일방통행이었으며 그 자리에서도 역시나 장성택에게는 반론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사법절차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장성택의 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와 닿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에 저들의 광기(狂氣) 서린 치죄(治罪)와 처형 방식은 몬도가네 영화의 소재를 실황(Live)으로 보는 것과 같았다. 이는 이성이 지배하는 합리적인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저들의 광기가 ‘정신적 외상(外傷)’, 즉 이른바 ‘트라우마(Trauma)’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북한 정권의 역사는 김씨 왕조 1인 독재 체제 수립을 위한 숙청의 역사로 일관해왔다. 그것도 잔인한 방법에 의한 피의 숙청이었다. 1950년대에 ‘연안파’와 ‘소련파’가, 1960년대에 ‘갑산파’가 종파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그렇게 처형되었다. 통치 방식이 세습되는 세습왕조에서는 숙청의 방법도 통치 방식의 하나로 세습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볼 때 권력이 3대에 이르러 김정은의 멘토, 장성택의 몬도가네 식 처형에 이르기까지 북한 주민들은 끔찍한 숙청의 ‘트라우마’에 무척이나 시달려 왔다고 볼 수 있다.

‘트라우마’는 건강한 정신 작용의 메커니즘에 충격을 가해 그것을 망가뜨린다. 그렇다면 그 같은 ‘트라우마’를 북한 주민들은 지금까지 어떻게 견디어 왔는지, 그것이 혹여 민족 동질성을 해치지나 않았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한국의 언론은 연일 장성택 처형과 관련한 얘기로 도배질을 한다. 저들이 한국 신문과 방송의 핫 콘텐츠(Hot contents)를 만들어 제공해주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장성택 처형 쇼크는 세계의 관심을 빨아들이는 블랙홀(Black hole)이 돼주고 있다. 장성택 처형의 여파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그 파장의 지속 기간은 적어도 장성택 처형의 쇼크가 안긴 ‘트라우마’가 다소라도 가실 때까지는 가지 않을까 싶다.

장성택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는 민주적 사법 절차의 관점에서 볼 때는 분명하지가 않다. 하지만 그의 잔인한 처형에서 묻어나오는 것은 북한의 젊은 최고 권력자 김정은의 그에 대한 무서운 증오심과 적개심이다. 장성택은 김정은의 고모부다. 김정은의 아버지인 김정일의 여동생, 그러니까 김정은의 고모인 김경희의 남편이 장성택이다. 이런 인연으로 장성택이 3년 전 김정은이 애송이 권력 세습자였을 때 김정은의 권력을 키운 보모 내지 배양인(培養人)이며 인큐베이터(Incubator)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혈통’을 강조하는 북한 체제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에게는 한나라 고조 유방을 황제로 만들어 놓은 공신 중의 공신이지만 막상 그 공을 누려야 할 때, 다른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권력의 주변에 꼬이거나 말거나 그 북새통에서 쑥 빠져나와버려 천수(天壽)를 누린 장량(張良)의 지혜와 같은 슬기로움을 갖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정은의 권력이 커나가고 그에게 굽실거리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충성경쟁이 벌어질 때 장성택만이 처음처럼 안이하고 편하게 김정은을 대했다면 그는 김정은의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장성택의 주변에 권력의 단맛을 아는 무리들이 눈에 띄게 모여들고 장성택 자신이 그가 맡은 분야를 자신의 할거(割據)의 거점으로 삼는 눈치가 보였다면 아무리 고모부이지만 김정은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었을 법하다.

김정은은 그의 주변 누구에게서나 진심으로 경륜이 중후하다고 인정받기는 어려운 젊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주변은 무시무시한 카리스마의 독재자들인 김일성 김정일 두 선대(先代)를 모시면서 권력을 누리고 살아남은 권력의 이무기들이 우글거린다. 그 속에서 우뚝 지존의 권력자로 일어서려는 그는 마냥 자신만만하게 웃고 다니는 것 같았어도 내심으로는 항상 긴장하고 경계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것이 권력 기반이 취약한 젊은 지도자의 콤플렉스다. 더욱이 장성택에 대한 김정은의 의심을 간파한 세력들은 입지의 회복을 위해 젊은 지도자의 콤플렉스를 한껏 자극했을 것이며 이렇게 되어 결국에는 정성택에 대한 엽기적인 처형이 단행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장성택의 처형이 젊은 지도자의 콤플렉스의 발로였다면 그것이 김정은의 앞날에 결코 희망적인 조짐이 될 수 없다. 그는 장성택을 무참히 죽였지만 앞으로 그보다 더 무참하게 죽일 희생양을 찾을지 모른다. 이렇게 죽여 가다보면 아무도 그의 신임을 믿고 진심으로 그를 따를 자가 없다. 포악한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은 그 임금이 비록 적대 정파들을 제거했더라도 좋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자신이 그 꼴을 당하게 될지 불안해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들은 면전에서는 복배하지만 딴 생각을 하며 살 길을 찾게 된다. 무참히 사람을 죽인 독재자가 꼭 그렇게 무참히 죽임을 당해 비참하게 끝맺음을 해온 역사적인 사례들이 가르쳐 주는 것이 많다. 김정은의 권력이 앞으로 1~2년이나 갈지 말지 모르겠다는 시중의 얘기들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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