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 5년 전 일. 이모 씨는 손자가 태어나자 차나무 다(변에 )’ ()를 넣어 이다현(李木변에茶弦)’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차나무처럼 아름다운 인품의 향기를 이웃에 뿌리며 튼튼하게 살아라는 뜻으로. 동사무소에 갔다. 하지만 출생신고가 안 된다고 했다. ‘차나무 다는 옥편에 있는 한자. “내 손자 이름 내가 신고하는데, 옥편에도 있는 한자인데 왜 신고를 안 받아주느냐고 따져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대신 아버지 다()라는 글자를 넣어 이다현(李爹弦)’으로 신고했다. 하지만 동사무소를 나서면서 못내 씁쓸했다. 직접 지은 손자 이름을 쓸 수 없다는 점에서.

필자가 구청에 문의해 보았었다. 답변은 역시 한자가 대법원 예규 111호에 정한 인명용 한자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것. 한자를 꼭 쓰려면 한글로 신고해놓고 규칙 개정 등 추가 조치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이 언제 조치해줄지 모른다. 그 때까지는 가족관계등록부에 붉은 줄을 그어놓고 있어보라는 말이었다. 2008년 대법원 인명용 한자는 5151. ‘()는 모두 네 글자 뿐. ‘많을 다()’ ‘아버지 다()’ ‘차 다()’깊은 모양 다’. ㅎ·ㄴ글에는 ()’ ‘()’ ‘()’ ‘()’도 있다. 한자 옥편에는 더 많은 ()들이 있지만 다 출생신고가 안 된단다.

최근 대법원 쪽을 두드려 보았다. 인명용 한자가 5761자로 확인됐다. 슬그머니 개수가 늘어난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홈페이지에서 어렵사리 검색해 보았다. 놀랍게도 차나무 다(변에 )’ ()가 인명용 한자에 포함돼 있었다. 이제는 ()8개가 된 것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출생 때 왜 국민의 이름 사용 권리를 제한하느냐, 한자 개수를 늘렸다면 국민의 알권리를 존중해 언론 등을 통해 왜 먼저 알리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 이에 대한 대법원 답변 내용.

혼란과 불편을 방지하고 국민의 언어생활을 순화하기 위해글자가 인명용 한자에 포함돼 있지 않다면 이는 선정기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개개인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선호도에 기인한 것으로서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한자가 아니라는 반증인 점, 가족관계등록부에는 반영하지 못해도 사용할 수는 있는 점2년 내지 3년 주기로 추가해 달라는 민원 등을 고려해 대법관회의의 의결을 거쳐 규칙 개정을 통해 가족관계등록부에 한자를 병기(倂記)하도록 할 수 있다.”

대법원이 국민의 언어생활 순화까지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듯 법에도 과잉 금지 원칙, 혹은 비례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르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방법의 적정성, 피해의 최소성, 침해되는 사익과의 균형성 등을 다 갖추지 않으면 그 법률은 위헌이다. 대법원은 이름이 국민의 기본권의 하나라고 했다. 200511월 개명을 허가하면서 쓴 판결내용이다. 성명권은 헌법상의 행복추구권과 인격권의 한 내용을 이루는 것이며 자기결정권의 대상이 되는 것이므로 본인의 주관적인 의사가 중시돼야 한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을 제한한 대법원 규칙은 위헌 소지가 있다. 대법원 판결 취지와도 어긋난 자기부정이다. 제도를 아는 부모도, 아는 담당 공무원도 적다. 아가가 태어나자마자 호적에 붉은 줄 그어놓고 대법원의 시혜적인 추가 조치를 기다리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현재 한글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해놓고 규칙 개정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민원인의 한자(漢字) 수는 40글자라고 한다.)

예전에는 옥편의 한자들을 이름에 다 쓸 수 있었다. 1991년부터 호적사무를 전산처리로 바꾸면서 인명용 한자를 정했다. 호적 기록 담당공무원은 편해졌다. 하지만 오랜 기간 조사 연구와 학계 유림 등의 의견수렴을 거쳐 신중히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엉뚱한 한자도 들어 있다. ‘죽을 사()’ ‘훔칠 도()’ ‘배설물 시()’ ‘마귀 마()’ ‘재앙 화()’ ‘무덤 묘()’ . 이 글자를 누가 이름에 쓸까. 꼭 등록돼야 할 한자가 빠지고 부적절한 한자도 많으니 졸속 논란이 일 수밖에.

타이완의 석학 린위탕(林語堂) 박사는 세종대왕이 만든 우수한 글자인 한글처럼 한자도 동이족(東夷族)’, 즉 한민족 조상들이 만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자를 공부하지 않으면 한자가 바탕이 돼 쌓아올려진 존귀한 동양 정신문화의 진수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는 율사 출신 국회의원도, 법조인도 많다. 하지만, 위헌 소지가 있는 이 같은 규칙에 대해 헌법 소원이 제기됐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다들 다른 일로 바쁜 모양이다. 다른 일이란 정쟁(政爭)’ 등이 아닐까. 인명용 한자를 공식 발표 없이 찔끔찔끔 추가하는 대법원 태도도 궁색해 보인다. 정보를 사전에 알도록 해주는 등 더 낮은 자세로 대국민 법률서비스를 해 줬으면.

신생아 부모들은 출생신고를 하러 동사무소를 찾는다. 대법원에 가는 것이 아니다. 전국의 모든 동사무소 등에서 미리 공지해줘야 한다. 대법원 홈페이지 검색 시스템만으로는 미흡하다. 몇 글자를 추가해 현재 모두 몇 글자인지와 그 내용을 미리 자세히, 그리고 알기 쉽게 범정부차원에서 국민 앞에 밝혀 신생아 부모들이 소중한 기본권을 행사하는 데 장애가 없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행정편의를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한 것은 문제다. 아예 인명용 한자라는 제한 자체를 없애야 한다. 이제라도 전면재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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