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장탕은 두나라 출신으로 아버지는 장안의 하급관리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외출을 하면서 어린 장탕에게 집을 보라고 맡겼다. 외출했던 아버지가 돌아와 보니 쥐가 고기를 물어 갔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장탕을 회초리로 때렸다. 그러자 장탕은 쥐구멍을 파헤치고 먹다 남은 고기와 함께 쥐를 끌어내 때리고는 쥐 재판을 열었다. 우선 영장을 만들고 이어서 진술서를 작성하고 논고를 읽은 뒤 마당 끝에다 쥐와 증거물인 고기를 내놓고 판결문을 읽은 다음 쥐를 책형에 처했다.

그 일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는 그 판결문을 읽어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사법관이 범죄 사실을 논고한 것처럼 한 점의 흠도 없었다. 그 뒤부터 아버지는 장탕에게 관청의 판결문을 쓰게 했다.

장탕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교묘하게 움직이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하급관리였을 무렵 투기에 속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인연으로 장안의 거상인 전갑과 어옹숙 등과 암암리에 교제를 두텁게 했다.

장탕은 출세하여 9경(대신)으로 승진하자 이름 있는 사대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자기 비위에 맞지 않은 자에게도 겉으로는 정중한 태도로 교제했다.

당시 무제는 유학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장탕은 무제에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학 경전에 근본 원리를 두자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사(학술 고문관)의 제자로 ‘상서’나 ‘춘추’에 정통한 자를 시켜 법과 유학 사상에 맞지 않는 법령을 개정했다. 또한 여지껏 판례가 없는 안건의 결재를 무제에게 구할 때는 미리 자신의 안을 짜 가지고 자료로 함께 제출했다. 무제가 재가한 것은 그 뒤의 판결 근거가 되도록 법령집에 기재했다. 그와 같이 하여 무제에게서 총명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판결문을 상주해서 무제의 꾸중을 받을 경우에 장탕은 즉각 사죄하고 무제의 뜻에 따랐으나 그럴 때는 언제나 자신의 부하 가운데서 유능한 사람을 들먹이면서 이렇게 대답하기 일쑤였다.

“방금 꾸중하셨던 조항에 관해서는 부하 관리 하나가 꼭 같은 취지로 반대를 했습니다. 하오나 어리석은 소신은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저의 책임이옵니다.”

그때마다 장탕의 책임은 불문에 붙여졌다.

그와 반대로 판결문을 건의해서 칭찬을 들을 때에도 역시 부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것은 저의 판단이 아니옵니다. 부하인 아무개가 저에게 말한 의견을 그대로 따른 것이옵니다.” 그 같이 장탕은 부하들을 끌어내어 추천을 하였던 것이다.

무제가 중죄에 처하려는 사건에는 평소에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 인물에게 맡겼고, 죄를 용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건에는 가벼운 판결을 내리는 자에게 맡겼다. 또한 재판에 부쳐진 인물이 권세를 떨치고 있는 실력자라면 법을 억지로 적용시키면서까지 죄상을 꾸몄다. 만약 돈도 없고 지위도 없는 자라면 ‘법에는 저촉되지만 아무쪼록 배려가 있으시기를’ 그렇게 무제에게 건의하여 번번이 뜻을 이루었다.

장탕은 고관이 되고부터는 손님을 정중히 대접하고 친지의 아들이 실력대로 관리로 임용되거나 형제 중 누군가 곤경에 빠졌을 때는 자기 일처럼 돌보았다. 그리고 중신들을 자주 방문하여 문안을 드렸다. 그 때문에 조사는 가혹하고 법 적용이 공평하지는 않았어도 장탕의 평판은 좋은 편이었다. 더구나 장평의 손발이 되어 법 집행을 한 하급관리 가운데는 학문을 숭상하는 자가 많았다. 승상 공손홍도 장탕의 수완을 으레 칭찬했다.

그 무렵 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에 의한 모반이 드러났다. 장탕은 사건의 관계자를 철저히 다그치고 꾸짖었다. 무제는 장탕이 가혹한 줄 알지만 엄조와 오피만은 사면시키려했다. 그러나 장탕은 반대했다.

“오피는 원래 이 모반을 계획했던 자입니다. 또한 엄조는 폐하의 신임이 두텁고 측근에서 황제를 보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후와 은밀히 내통했습니다. 만일 이 두 사람을 용서하신다면 후세에 본보기가 없어지고 맙니다.” 무제는 장탕의 의견의 들어 그 처분을 재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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