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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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애국적 도둑(?)이 대마도 한 절에서 훔쳐온 고려시대 금동보살좌상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처지에 있다. 대전 고등법원은 1심의 판결을 뒤집고 일본으로 반환하라고 판결했다. 지난번 부석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금동보살좌상 인도 청구 항소심에서 1심을 뒤집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것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330년 서주(서산의 고려시대 명칭)에 있는 부석사가 해당 불상을 제작했다는 사실관계는 인정할 수 있고, 왜구가 약탈해 불법 반출했다고 볼만한 증거도 있다. 그러나 당시 부석사가 지금의 부석사와 같은 종교단체라는 입증이 되지 않아 소유권을 인정하기 어렵다.’

재판부가 고려 말 서산 지역에 자주 침범한 왜구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과소평가 한 것이다. 지금의 부석사가 당시 고려 말 부석사라는 것은 사찰 사료, 읍지 등 기록, 동국여지승람 등 지리서에 자명한데 말이다.

금동보살좌상은 1330년 고려 충선왕 즉위에 맞춰 부석사에 봉안된 불상으로 복장 기록에 ‘1330년경 서주에 있는 사찰에 봉안하려고 제작했다는 내용이 있다.

비교적 큰 보살상에 속하며 금도금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이다. 머리에 썼던 화려한 보관도 없어졌다. 아무리 봐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흔적이 역력하다. 불신을 빛나게 했을 금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일까.

금동보살좌상이라고 명명한 것은 의문 등 조각에 숨겨진 금빛이 아직도 찾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고 푸른빛이 오래전에 불을 맞은 흔적이다. 관음보살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진 것은 이런 이유로 손상됐을 가능성이 크다.

왜구들은 한반도의 서해지역에 침입하면 건물에 불을 지르고 혼비백산하는 고려인들을 짐승 대하듯 사냥했다. 노인이나 청년들을 도륙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만 납치했다. 노비로 돈을 받고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해 지역의 해안가, 서해 많은 지역의 사찰과 민가들이 화를 입었다. 김해에 있던 대찰 서백사(지금은 폐사)에 소장됐던 700권의 신라·고려 초 묵서경은 모두 도난을 당했다.

보물급인 고려 초조대장경과 묵서경은 지금 한 두점씩 경매에 나와 일본에서 한국으로 회류돼 온다. 지금도 수천여점이 일본 대마도를 위시하여 여러 사찰에 소장돼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 중에는 신라 때부터 전해져 온 국보급 묵서경, 고려 초조대장경도 있다. 한반도에 있었으면 많은 전란으로 훼손됐을 문화재들을 훔쳐가 잘 보존했다 돌려준 결과가 됐으니 아이러니한 생각마저 든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불교는 탄압을 받았다. 세종 때만 해도 일본은 사신을 보내 팔만대장경의 인출본을 달라고 애걸했다. 조선에서 가져온 불경들을 큰 보물로 여겼다.

대마도 관음사에 소장됐던 금동보살상도 비록 훔친 것이었지만 이런 대접을 받았을 게다. 그들이 고려 말 불상인 줄 알면서도 대대로 예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대마도의 전통적인 조선 문화에 대한 선망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한반도 침략 원천 동기는 이런데서 출발했다. 일본은 과거의 왜구들처럼 임진전쟁을 통해 우리 문화유산을 뿌리 채 가져갔다. 웅천, 계룡산 사기막 골에서 그릇을 굽던 장인들을 모두 납치해 갔다. 도자기 산업을 육성해 서구에 수출, 근세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부를 창출, 강대국이 됐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고려 금동보살좌상에 집착해 꼭 돌려받겠다는 의지가 한편으로는 무섭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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