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주필)

 
한반도의 뭍이 남쪽 바다로 탁 트이는 땅 끝 여수의 밤은 낮의 여수와 얼굴 모습이 전연 다르다. 여수의 밤은 꿈의 세계다. 흔히 숨겨진 미답의 땅이나 그 같은 땅에 숨겨진 절경을 비경(秘境)이라고 하지만 어떤 곳이 비경이라 하더라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라면 비경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은 낮 동안의 일에 그친다. 그렇다고 볼 때 어두운 밤에 도리어 비경으로 살아나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여수는 매우 독특한 도시다. 여수의 야경은 확실히 신비롭고 경이롭다.

우연히라도 여수의 야경에 한 번 빠져든 사람은, 만나면 더 만나고픈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듯 그 곳의 밤경치를 다시 찾아가지 않고는 배기기 어렵다. 혹여라도 그리는 사람이 그곳에 산다면 임을 보는 것이 목적이 되거나 핑계가 되어 여수의 밤경치를 더 자주 찾아가 감상하고 싶어질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임도 보고 뽕도 따는데 싫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여수의 야경을 비경으로 만들어주는 안성맞춤의 조건이 되는 것은 우선적으로 해안을 따라 길게 형성된 항구의 지형적 특성이다. 그 지형적 특성을 살린 물과 불의 조화로 황홀한 비경을 연출한다.

여수 구항(舊港) 남쪽 앞바다에는 돌산 섬이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섬은 여수의 명물인 돌산 대교와 거북선 대교로 항구와 연륙(連陸)이 이루어졌다. 그 두 대교는 구항이 돌산 섬을 얼싸 안으려는 듯 활짝 벌린 구항의 두 팔과 같다. 동시에 두 팔을 벌리고 뭍의 항구로 달려가는 듯한 돌산 섬의 두 팔 노릇도 한다. 구항과 돌산 섬은 이 두 대교를 두 팔 로 공유하면서 장군 도를 가운데 품에 두고 서로 행여 떨어질세라 서로를 꽉 껴안았다.

그 돌산 섬은 얼핏 항구 앞을 가로막아 선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낮은 지대에서도 섬 너머가 충분히 짐작이 갈 뿐 아니라 높은 곳에 서면 그 너머가 넘겨다보이는 절묘한 해발고도를 지녔다. 사실은 그 섬 자체가 여수를 세계적 미항이 되게 하는 핵심적 조건 중의 하나를 이룬다. 야경에서도 그 역할은 결정적이다. 여수 야경을 보기 위한 최적의 관망대임과 동시에 반대편에서 볼 때는 멋진 관망의 대상물이다. 역시나 매큼한 돌산 갓김치의 원산지이며 해돋이 구경의 명소인 향일암(向日庵)도 그곳에 있다. 그렇지만 이 섬의 존재 이유는 그것들이 다가 아니다.

돌산 섬은 여수를 위해 태풍을 막아주는 천혜의 든든한 바람막이며 천연 방파제다. 여수 앞바다에 널린 수많은 한려수도(閑麗水道)의 다른 섬들과 함께 여수를 강한 바람과 거센 파도로부터 보호해준다. 그렇기에 여수는 태풍의 길목이면서도 유독 한반도 남쪽 지방의 연례행사인 여름과 초가을 태풍 피해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안전할 수가 있다. 이것이 여수 앞바다가 어느 지역 바다에 비해서도 훨씬 더 푸근하고 불빛 비치는 밤바다는 매끄러운 유리알과 같아 빛의 난반사가 덜하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까닭이 된다.

대저 인심(人心)은 자연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기 마련이다. 여수의 인심은 그 푸근하고 청정한 바다가 영향을 미쳐서인지 거친 파도와 짠 바닷물을 닮기 마련인 억센 여느 항도의 인심과는 사뭇 다르다. 적어도 필자의 경험으로 말하면 초행의 과객일망정 그 푸근한 인심을 느끼는데 그리 긴 시간은 필요하지가 않다. 여수는 여로(旅路)의 객(客)을 포근하게 품어줄 수 있는 낭만의 도시이며 너그러운 도시일 뿐 아니라 객의 미각을 최상으로 만족시켜주는 매력의 웰빙(Well-being) 도시다. 여수에서 붕장어탕이나 서대회를 먹어 본 적이 있는가.

밝은 해가 땅 끝 다도해의 미항(美港) 여수의 어깨 너머로 지기 시작할 때 항구를 굽어보는 돌산 공원에 오르면 점차 밤의 신비경에 빠져 들게 된다. 여수는 지형상 거산(巨山)들은 아니지만 바다를 향해 바짝 밀고 내려온 듯한 높고 낮은 산들의 연봉(連峰)들과 연안 사이의 좁은 터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들쭉날쭉 도시가 길게 뻗쳐있다. 연안과 도시의 배경을 이루는 산들 사이에 형성된 터가 좁기에 연안에 바짝 붙어있는 주택과 건물들은 혹여 바다가 화가 났을 때 파도에 삼키일 것만 같고, 연안에서 멀리 떨어진 그것들은 파도로부터는 안전하지만 산 중턱에까지 밀려나 있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같은 도시의 지형적 특성은 밝은 낮에 볼 때는 다소는 난개발의 인상이 든다. 하지만 해가 져 어둑어둑해지면서부터는 도시 도처의 불빛들이 해안선과 산 중턱까지에 걸쳐 뚜렷한 경계를 이루며 무리지어 피어나 여수의 밤을 신비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해안선을 따라 긴 띠를 이루며 밤하늘의 별들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불빛들은 급기야는 뭇별들이 모여 우윳빛 강처럼 밤하늘을 길게 흐르는 은하수(Milky Way)와 같은 모습이 된다. 영락없이 하늘의 은하수와 대칭을 이루는 지상의 은하수다. 사람들은 하늘의 뭇별들을 보면서 하늘의 섭리와 우주의 신비, 별 하나하나가 간직하고 있는 존재의 이유 등을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지상의 은하수를 이루는 불빛을 보면서도 마찬가지다. 저 수많은 지상의 불빛 하나하나가 켜질 때는 뭔가는 나름의 의미심장한 사연들이 있어서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인간은 이율배반적이게도 군집적이며 동시에 독자적이다. 공동생활을 하면서도 동시에 독자성을 추구하며 마찬가지로 독자성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성을 추구한다. 따라서 저 불빛 하나하나에도 그 같이 사회적이거나 또는 개인적인 각양각색의 세속적인 사연들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수많은 사연들이 저 불빛만큼의 숫자로 표현되어 지상의 은하수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거나 밤경치가 하늘의 은하수처럼 신비롭게 펼쳐지는 꿈의 도시는 해안선이 길고 아기자기하게 굴곡진 여수 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상의 은하수가 되는 여수 야경의 압권은 구항과 돌산 섬, 그 사이의 장군도 그리고 돌산 대교가 펼치는 황홀한 비경의 연출이다. 장군도와 돌산 대교는 색깔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지상 은하수 속의 카멜레온이다. 그 카멜레온은 두 발을 한껏 넓게 벌리어 대교를 지탱해주는 거대한 두 개의 교탑(橋塔)과 일직선을 이루는 돌산 공원의 돌산 대교 기념탑과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진남관, 그리고 멀리 하멜 등대가 은하수의 왕별과 같은 밝은 불빛으로 그것이 실컷 재주를 뽐내도록 비추어주고 지켜본다. 그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여수의 야경, 여수 비경의 황홀한 모습을 짧은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 한다. 이런 곳을 두고 왜 사람들은 외국으로만 여행을 떠나 돈을 낭비하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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