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를 타는 산 ‘비슬산(琵瑟山)’

▲ 대구와 청도의 경계에 서 있는 ‘비슬산(琵瑟山)’ ⓒ천지일보(뉴스천지)

그림 같은 청도는 서편에 자리한 웅장한 비슬산을 마주하며 끝이 난다. 대구와 청도의 경계에 서 있는 비슬산은 청도의 핵심이자 대표라고 할 수 있다.

대구 쪽에서도 비슬산을 바라볼 수 있지만 다들 비슬산의 참맛을 보기 위해서는 “현풍면이나 청도에서 봐야 비슬산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보면 포근하게 청도를 감싸고 있는 비슬산의 모양이 풍수지리적으로 ‘열두 폭 치마를 입은 옥녀가 거문고를 타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청도군민들의 가슴에 비슬산은 남다르게 자리 잡고 있었다. 청도에서 태어나 조각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박종태 (사)한국미술협회 청도부지부장은 “청도군민에게 비슬산은 어머니의 품 같은 안식처이자 치유의 역할을 해주는 ‘상징적인 산’”이라고 소개했다.

청도군에 속한 학교들의 교가에도 ‘비슬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주 어렸을 적부터 비슬산은 청도 어린아이의 마음에, 머리에, 입술에 배어있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을 몸에 새긴 비슬산은 세월만큼이나 이름도 다양하고 이야기도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이야기는 비슬산의 산신 정성천왕에 얽힌 이야기다.

칠불시대 중 하나인 가섭불시대 정성천왕은 한날 꿈을 꾼다. 성인들이 비슬산의 골과 등성이, 봉우리마다 깃들여 빛을 발하는 꿈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성인들은 찬란한 햇빛을 받은 봄날의 진달래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꿈이었다. 하지만 정성천왕은 이 꿈이 꿈으로 머물길 원치 않았다. 이 꿈이 실제로 실현되는 게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 정성천왕은 맹세했다. “발원(發願)하오니, 지금 바로 성불하지 않고 앞으로 비슬산에서 1000명의 성인이 나올 때까지 성불을 유보하겠나이다. 1000명의 성인을 본 후 성불하여 남은 과보를 받겠나이다.”

이 같은 연유에서 비슬산은 1000명의 성인이 약속된 ‘약속의 산’으로 불린다. 또 이 약속 때문인지 비슬산에는 도통한 성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

비슬산 자락에서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보낸 일연스님도 비슬산 자락을 오가며 이 지역에 전해오는 여러 성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나중에 <삼국유사>에도 실리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일화가 ‘관기와 도성’의 이야기다. ‘하늘의 기미를 관찰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관기(觀機)’와 ‘도를 이루었다’는 뜻의 ‘도성(道成)’은 친구였다. 이 둘은 삼라만상과 더불어 비슬산에서 은자(隱者)의 삶을 살았다.

관기는 비슬산 남쪽 자락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10리쯤 떨어진 북쪽의 굴에서 지냈다. 서로의 소식이 궁금하면 이들은 바람을 통신수단 삼아 소통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바람이 관기가 있는 남쪽으로 불어 나무들이 관기가 있는 곳을 향해 굽었다. 친구가 보내온 바람의 소식을 듣고 관기는 길을 나섰다.

마령재를 지나 바위로 된 비슬산 정상을 지나 거대한 바위들이 벼랑을 이룬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내려가야 도성이 사는 큰 바위가 나타났다.

관기도 도성이 보고 싶으면 바람을 통해 마음을 전했다. 바람이 북쪽으로 불어 나무들이 도성이 있는 곳을 향해 굽어지면 도성도 관기를 보러 길을 나섰다.

그렇게 만난 둘은 마주 앉아 그동안 공부한 것을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며 왕래했다. 이렇게 왕래하며 삼라만상과 더불어 소통하던 도성은 비로소 모든 것을 다 깨닫고 그가 거처했던 바위 사이로 솟구쳐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어디로 갔는지 도성은 사라졌다.

그 소식을 들은 관기는 도성이 살던 바위굴을 찾았지만 이미 도성이 떠난 뒤였다. 이후 관기 역시 깨달음의 소식을 접하고 친구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 (2)편에 계속됩니다.

[이승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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