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상 화백 그림처럼 살다, 삶처럼 그리다 (1)
이종상 화백 그림처럼 살다, 삶처럼 그리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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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혼을 피운 화백 일랑 이종상 교수

▲ 오천원권, 오만원권의 영정을 그린 화백으로 더욱 유명한 이종상 서울대 교수 (사진제공: 이종상 교수)


어느 작업도 소홀히 임하지 않는다. 작업을 끝내면 녹초가 돼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개월 고생할 것을 알지만 허투루 손을 놀리지 않는다. 작품마다 대작(大作)으로 일컬어지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 붓을 잡은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그는 늘 초심으로 임한다. 그렇게 나온 산물(産物)은 꼭 화백과 닮았다. 육십여 년 전 ‘마음과 그림은 일치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여전히 마음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노화백.대중에게 화폐 화가로 잘 알려진 일랑 이종상(76) 서울대 명예교수다.

젊은 시절 이종상 교수는 옛 진경산수화를 보며 궁금증이 생겼다.
‘왜 독도 그림만 없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우리네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에 독도가 빠져있다니….

1977년 그는 한반도 제일 끝에서 동해를 지키는 독도를 최초로 그린 이후 40여 년간 ‘독도문화심기운동’을 펼치고 있다. 겸재 정선 이후에 우리네 그림이 제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 겸재 이전에는 오악사독(五嶽四瀆, 다섯 개의 산과 네 개의 대천)과 같은 대륙의 화풍을 좇았고, 겸재의 진경산수가 등장하면서 ‘인왕제색도’ ‘금강산도’ 같은 작품이 비로소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진경산수화풍의 정신을 잇고 실천하고자 직접 전국 곳곳을 누볐다. 서해안의 백령도와 외포리를 시작해 제주도로 내려가 다시 동해안을 훑고 울릉도를 밟았다. 독도 장벽에 부딪혔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벽을 뛰어넘으면서 진경산수화의 윤곽이 잡혔다.

한국 화가로서 살아간다는 것
독도의 자존심을 지키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정부나 국민은 독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역사가나 지리학자가 독도의 고지도를 찾는 게 다였다. 독도에 대한 무관심 속에 이 교수가 독도의 문화적 상징성을 처음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1977년 당시 아무도 관심 없던 독도를 그려보겠다고 한 길이 넘는 파도와 싸워가며 천신만고 끝에 찾아갔지요. 저는 독도를 정치, 외교적 현안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문화, 예술적으로 접근해보고 싶었습니다. 예술가의 작품이 역사에 대한 의식을 상실하면 곧 시대적 소명과 문화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는 늘 역사 읽기에 냉철해야 하며, 시대를 앞서 가는 창조적 예지가 필요합니다.”

독도가 갖는 문화적 상징성은 이뿐만이 아니다. 알파벳 A를 보면서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을 연상하듯 시각적으로 형상화된 인지력은 곧 문화의 힘이 된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 독도’의 이미지를 세계인에게 심어줄 수 있는 그림을 어떻게 하면 한국 화가의 손으로 그릴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했다.

그리하여 그는 독도에 대해 풍수지리, 지질, 역사 등 낱낱이 공부했다. 이러한 노고는 헛되지 않았다. 그가 화폭에 담은 독도 작품을 감상했다면 분명 느꼈을 것이다. 고요하면서도 독도 내면의 강한 힘과 독도를 사랑하는 작가의 열정을 말이다.

이 교수는 ‘독도교주’로 통한다. 독도에 들어가는 배를 타기 전에 “죄지은 녀석은 독도에 들어가지 마라”고 한단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독도로 가는 배 안에서 그는 하나, 둘, 셋으로 보이는 요술섬에 대해 설교하느라 바쁘다.

“죄지은 녀석이 배에 함께 타고 가면 하느님이 노해서 파도를 4미터로 만들어 버립니다. 독도에 이웃집 드나들 듯하는 저도 독도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고해성사합니다. 그래서 제가 ‘독도교주’가 된 것입니다.”

이 교수는 독도에 관심을 두기 이전 고구려사 연구에 몰두했다. 어쩌면 독도문화심기운동은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이라는 민족 문화운동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르겠다. 1960년대부터 고구려벽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1972년 고구려 문화 자생론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했다가 사회주의 작가로 몰려 가택 수사와 함께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무혐의로 나왔어요. 그 덕분에 고구려를 마음껏 그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원효 영정을 그리기 위해 <통섭>이라는 책을 읽고 원효의 기신사상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일본에 가면 원효대사가 소를 거꾸로 타고 앉아 기신론을 쓰고 있는 삽화가 있는데 이때 말을 타고 거꾸로 활 쏘는 고구려벽화가 떠오르더군요. ‘어떻게 거꾸로 활을 쏘는데 명중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기질은 어디서 왔나’ 등을 연구했습니다. 고구려벽화를 연구하다가 빨갱이로 몰렸죠.”

▶ (2)편에 계속됩니다.

[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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