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선조, 효종, 명성황후(고종 비), 숙명공주의 한글편지 (사진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또박또박 쓴 선조, 자상하고 인자해
시원한 서체 효종, 진취적이고 활달
거침 없는 명성황후, 강인한 기질

조선시대 한글편지 1500여건 검토
한문 필체가 한글에 그대로 반영돼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대부분 글씨체에는 글쓴이의 성품 또는 심정이 묻어난다. 가끔 조선시대 왕실 관련 인물의 친필이나 편지가 공개되는 날엔 모든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한다. 공개된 문서의 주인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누구나 궁금해지기 때문일 터.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문생활사연구소(소장 황문환)는 ‘조선시대 한글편지 서체 자전’을 펴냈다.

이는 한국연구재단의 기초학문육성사업의 중 ‘조선시대 한글편지의 수집ㆍ정리와 어휘ㆍ서체사전의 편찬’ 사업에 서체학, 문자학, 국어국문학, 서예계 등 전문가 31명이 참여해 5년 여간 연구한 결과다.

이들은 조선시대 왕ㆍ왕비ㆍ공주ㆍ궁녀ㆍ사대부ㆍ일반인 남녀가 쓴 한글편지 1500여 건을 검토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소개되거나 개별 편지첩에 묶여 소개됐던 한글편지들도 종합 분석했다. 이 중 대표적인 필사자 87명의 한글편지 400여 건을 모아 2100여 쪽에 달하는 ‘조선시대 한글편지 서체 자전’을 펴낸 것이다. 책은 조선시대 한글편지의 행 전체 모습뿐만아니라 어절, 음절, 자보를 서로 비교해 서체 간의 관련성과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편집됐다.

◆왕의 한글편지 서체

현재까지 발굴된 왕의 친필 편지는 선조, 효종, 현종, 숙종, 정조의 것으로, 이 중 선조는 중국 사신들이 그 필적을 얻고자 애를 썼을 정도로 왕 중에서 최고의 명필이었다. 정자(正字)로 쓴 선조의 한글편지는 한자를 섞어 써서 한문 글씨와 한글 글씨를 함께 볼 수 있어 이번 자전에도 실렸다.

선조는 딸(옹주)들에게 한글편지를 보냈다. 해서체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씨는 한문 필체로 한글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또 필체를 통해 궁밖에서 굶주린 백성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살펴주도록 했던 선조의 자상하고 인자한 인간성을 느낄 수 있다.

효종, 현종, 숙종, 정조의 한글편지도 한문 필체가 한글에 그대로 반영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거침없고 시원한 필체를 구사한 효종은 활달하고 진취적인 기품을, 시작점에 힘을 주어 곧게 잘 써내려가고자 했던 현종은 다정다감한 성격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또 획 하나하나를 정성 들여 쓴 숙종은 단정하고 올곧은 성품을, 힘차고 굵게 세로획을 그은 정조는 문체 반정을 추진했던 굳건한 의지의 군주였음을 엿볼 수 있다.

◆예사롭지 않은 왕비의 필체

장렬왕후(인조의 계비), 인선왕후(효종 비), 명성왕후(현종 비)는 모두 뛰어난 달필가로 통했다. 사대부가 남성의 필체와 닮아있는 이들 왕비의 필체도 한문 서체가 한글 서체로 구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숙휘공주에게 보낸 인현왕후(숙종 비)의 한글편지에서는 중심축이 ‘ㅣ, ㅏ, ㅓ’ 등의 세로획을 기준으로 글자의 오른쪽에 맞춰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궁체’로 일컬어지는 서체의 특징이다. 세로획의 기필 부분도 궁체와 같은 형태를 보여 ‘궁체’의 완성으로 평가된다.

또 명성황후(고종 비)의 한글편지는 친필 편지만 140여 편이 전해진다. 명성황후가 민영소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궁체도 아니고, 한문 서체가 반영된 것도 아닌 개성적인 서체를 보여준다. 줄이 인쇄된 시전지에 쓴 편지조차 세로줄이 똑바르지 않은 것이 많다.

명성황후는 줄을 맞추는 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흘림체로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자기만의 굳은 신념과 정신으로 일국을 좌지우지하던 명성황후의 강인한 기질이 필체를 통해 유감없이 드러난다.

◆숙명공주의 글씨

공주의 한글편지가 온전하게 전하는 것은 효종의 둘째 딸인 숙명공주의 편지 1편뿐이다. 이는 효종이 숙명공주에게 편지를 보낼 때 숙명공주가 먼저 보낸 문안 편지의 편지지 여백에 사연을 써서 보내 그나마 남아있게 됐다.

단아하고 깔끔한 자형 필체를 구사한 숙명공주의 편지에서는 가녀린 획의 모습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공주의 고운 모습과 예쁜 성품을 보여주는 듯하다. 초성 ‘ㅇ’ 자와 ‘ㄴ, ㄹ, ㅂ’ 등의 받침 형태가 숙종의 글씨와 닮았다.

이종덕 어문생활사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이외에도 왕실의 편지 대필을 했던 궁녀의 글씨나 송시열, 이동표, 정경세 등 역사 속 인물의 서체를 비롯해 추사 김정희와 그의 부친 김노경의 한글편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한글편지를 추사의 한글편지와 함께 살펴보면 추사에게서 배운 대원군의 필체가 한글에서도 나타남을 (이번 자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황문환 어문생활사연구소 소장은 “한글 편지 서체 자전의 내용은 난해한 문자 판독은 물론 서체적 조형미가 뛰어나 한글 서예작품 창작 서체로의 응용, 컴퓨터 폰트 개발, 패션 산업, 서체 디자인 등 예술과 산업에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품격까지 갖추고 있어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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