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내가 들으니 성인의 후손은 비록 왕에 오르지 못할지라도 반드시 재덕에 통달한 자가 있다고 했다. 공자는 성인의 후손인데, 비록 나이가 열일곱밖에 안 되지만 예를 좋아하고 공손함이 그 성인과 같으니 바로 통달한 자가 아니겠느냐. 너는 내가 죽거든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대부 맹희자가 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그의 후계자인 의자(懿子)에게 남긴 유훈이다.

맹희자는 성인의 후손인 공자의 가문을 주목했다. 공자의 행실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공자의 선조 중에는 불보하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예를 몸에 익혀 재덕을 통달한 자로 여겨졌다.

불보하는 나라로부터 세 번 명을 받았다. 그는 명을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해졌다. 첫 번째 명을 받을 때에는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을 받을 때에는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을 받을 때에는 큰절을 한 번 한 뒤에 받았다. 길을 걸을 때에는 담장가를 따라다녀 누구도 감히 경멸하지 못했고, 솥에 풀과 죽을 쑤어서 청렴하게 살았다.

이 같은 가문의 내력을 알고 있는 맹희자의 눈에 공자의 공손함은 더 빛나 보였다. 결국 의자는 스승의 말대로 공자에게 나아가 예를 배웠다.

공자는 키가 2미터가 넘는 거구였다. 그가 처음으로 관직에 진출한 직책은 위리(창고지기)였다. 나라의 창고지기가 아니라 당시 집권자 중 하나인 계(季)씨 가문 창고지기를 맡아 충실히 일했다.

이후 승진해 승전(목장관리인)이 됐다. 곳곳에는 그가 목장을 맡자 소와 말이 아주 잘 번식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당시 공자는 크게 인정받지 못한 말단 관리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나라의 관제와 예법을 공부했고, 예(禮) 전문가로 서서히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공자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BC 500년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의 경공이 회담을 진행하고 있을 때 공자가 의례를 맡아 노나라가 빼앗긴 땅을 되찾으면서부터다.

하지만 공자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시기와 질투로 번번이 벼슬길이 막혔던 것.

그러나 노나라 정공은 공자의 제덕을 알아봤다. 공자를 중도의 읍재로 삼았다. 모든 사람이 공자를 따랐고, 공자의 나이 56세에 재상의 일을 맡게 됐다.

공자가 정치를 본격적으로 맡은 지 석 달 만에 물건을 파는 자들은 값을 속이지 않게 됐다. 남자와 여자는 걸을 때 길을 달리했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자기 물건이 아니면 줍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 오는 손님들은 굳이 관리에게 허가를 받지 않고도 대접을 받았다.

이 같이 노나라의 국민들이 변화하자 가장 두려워한 존재는 제나라였다. 제나라는 공자의 예법을 배워 질서를 갖추고 평화로운 나라가 된 노나라에 위협을 느꼈다. 공자가 정치를 하는 이상 노나라가 강국이 돼서 가장 먼저 제나라를 합병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두려워진 제나라는 계략을 세운다. 노나라의 예와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이 계략으로 다시 노나라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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