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너희들 중 누가 숙량흘에게 시집을 갈테냐?”

숙량흘의 청혼을 무시할 수 없으나 나이 60이 넘은 숙량흘에게 자식을 시집보내기가 싫은 아버지가 다섯 딸에게 던진 물음이다. 여식들도 늙은 신랑에게 시집을 가기가 싫었던 터라 어느 누구 하나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막내딸 징재가 대답했다.

“여자는 출가하기 전 아버지의 말씀을 좇을 뿐입니다. 저희에게 물을 것 없이 아버지께서 정하십시오.” 이에 노인이 된 숙량흘에게 가장 나이가 어린 징재가 시집을 가게 됐다.

공자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혼인에 얽힌 설화다. 숙량흘은 당시 아들을 얻지 못해 고심하던 차에 새로운 신부를 찾았고, 징재는 그의 신부가 됐다. 하지만 자식은 쉽게 생기지 않았다.

부부는 중니산에 올라가 자식을 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징재는 태몽을 꾸게 된다. 오성(五星)의 정령이라는 다섯 노인이 나타났다. 이 노인은 한 짐승을 데리고 있었는데, 모습이 흡사 용과 같았다. 이 짐승이 징제를 향해 옥으로 된 판을 하나 토해냈는데 그 안에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수정의 아들은 쇠약한 주나라를 계승해 소왕이 되리라.”

소왕은 왕위에 있지 않지만 임금의 덕망을 갖춘 사람을 뜻하며 후에 사람들은 공자를 가리켜 이같이 부르게 된다. 태몽에서는 또 북방의 신이기도 하고 겨울의 신이기도 한 흑제도 등장했다. 흑제는 ‘공상’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장소를 일러줬다. 징재는 ‘공상’이 어디인 줄 몰라 숙량흘에게 물었다. ‘공상’은 물이 없는 돌도 된 굴을 가리켰고, 징재는 그곳에서 공자를 낳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세가(世家)에서는 공자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흘, 안씨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이구산에서 기도를 하여 공자를 얻었다. 갓난아이인 공자는 머리 중간이 움푹 패여 있었다. 이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고 지었다. 자(字)는 중니(仲尼), 성은 공(孔)이다. 사람들은 이름보다는 공 선생이라는 의미에서 공자라는 칭호를 주로 사용했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공자는 어머니 징재의 손에 키워졌다. 공자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자가 어린 시절 소꿉장난을 할 때에는 늘 제기를 펼쳐놓고 제례를 올리는 놀이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각에서는 이 제례(祭禮)를 학문으로 보기도 했다. 당시 학문은 반드시 예(禮)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공자가 제례를 지내는 것을 놀이로 삼았다는 일화 때문에 공자 어머니의 직업이 무당이 아니었냐는 설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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