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흥인지문을 옹성이 둘러진 반대편에서 본 모습(왼쪽), 1700~1800년대로 추정되는 당시 흥인지문의 모습(오른쪽 위, 자료사진), 옹성 끝에 설치된 치성의 모습으로 출입금지 구역(오른쪽 아래). ⓒ천지일보(뉴스천지)

약한 산세 보완 위한 형태
적에게 취약한 동쪽 방어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서울의 의류 중심지로 통하는 동대문에는 옛 조선 시대 국가 핵심 기관인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했던 성문이 하나 있다. 동대문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수도 서울의 동쪽 대문인 보물 제1호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흥인지문은 동쪽의 관문이자 함경도 등 여러 지역 출입 시에 거쳐야 했던 성문이다. 태조 5년(1396)에 완성됐다가 단종 1년(1453)에 보수하면서 고쳐 지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고종 6년(1869)에 재건해 현재까지 이르게 됐다.

동쪽 기운 높이고자 네 자로 命名

흥인지문은 서울 성곽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 중에서 유일하게 네 자의 이름이 붙여진 성문이다.

사대문의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따왔다. 동서남북의 사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며, 숙정문의 ‘정(靖)’은 ‘지(智)’를 대신해 붙였다. 덕목의 마지막 ‘신’은 고종 때 한양의 중심이었던 ‘보신각’에 붙여졌다.

그중 동쪽은 오행의 첫째 덕목인 木(목)과 仁(인)을 상징하는 곳이다. 수도 한양의 동쪽에는 ‘낙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한양을 보호하기에는 이 산의 기운이 약했다. 또한 왜구의 침입도 다른 성문에 비해 잦았다. 따라서 동쪽을 방어하는 성문 이름에 산맥을 뜻하는 之(지) 자를 붙여 동쪽의 기운을 높이고자 했으며, 지금의 ‘흥인지문(興仁之門)’이 탄생하게 됐다.

사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 둘러

동대문 중심에 자리한 흥인지문은 사방이 도로와 보도로 막혀있다. 처음 건립됐을 때도 마차와 사람이 다녔을 것이지만, 지금 성문 모습이 더 애처로워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한 번은 느꼈을 것이다.

흥인지문에 더 눈길이 가는 이유는 서울의 사대문ㆍ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옹성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한양에서 제일 취약한 동쪽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했던 것으로, 성문 밖으로 반원형의 옹성을 둘러 성문의 방어력을 높였다.

흥인지문이 자리한 곳에 있는 낙산은 높지도 험하지도 않은 산이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적의 공격을 받기 쉬웠다. 이를 고려해 적에게 성문이 잘 보이지 않도록 옹성을 쌓아 도성을 지키고자 했다.

▲ 옹성으로 둘러진 흥인지문의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적군 방어에 유리한 옹성과 치성

옹성을 쌓은 이유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성 근처로 다가온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이유도 있다. 일반적으로 성을 점령하려면 가장 먼저 성문을 점거해야 한다. 성문을 부수면 성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옹성이 성문 주변을 감싸고 있으면 먼저 적군은 옹성부터 공격해야 하며, 왼쪽에 뚫린 좁은 폭의 옹성 출입구로 돌아서 들어가려고 해도 많은 수의 군사가 한 번에 들어가기는 힘들다. 이처럼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적군을 막는 방어벽 역할을 했다.

또한 흥인지문에는 옹성 양 끝으로 치성을 설치했다. 치성은 성곽에서 바깥쪽으로 벽이 튀어나오도록 만든 부분이다. 치성을 설치함으로써 적이 쳐들어왔을 때 여러 방향에서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다포 양식, 조선 후기 특징 나타나

흥인지문은 숭례문과 같은 다포식 공포로 지어졌다. 하지만 숭례문은 고려시대 주심포식에서 조선시대 다포식으로 넘어가는 공포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반면 흥인지문은 이미 다포식이 정착한 조선 후기의 공포로써, 조선 후기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숭례문이 국보 1호이고 흥인지문이 보물 1호인 것은 이러한 공포 양식에서 보이는 건축적 특징 때문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건축 변화상이 돋보인 숭례문의 가치를 더 높게 본 것이다.

조선 후기 다포식 공포 특징이 뚜렷한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며, 화강석으로 된 홍예문의 축석 위에 지어졌다. 지붕은 정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흥인지문의 다포식 공포는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흥인지문 지붕 위에도 흙으로 만든 장식물인 ‘어처구니’가 있는데, 여러 모양의 상이 모여 있다고 해 ‘잡상’이라고도 부른다.

문화재 안전 위해 동시간대 순찰 관리

목재(木材) 중층건물인 흥인지문은 현재 종로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종로구청 문화재관리과 나신균 주임은 “구청 문화재 관리 담당 직원들과 경비원들이 하루 3교대로 돌아가며 동일한 시간에 3~4명이 함께 순찰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CCTV와 열감지기 등을 수시로 확인하며 안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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