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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는 1648(인조 26)년 모친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상을 당하여 부친상 때와 마찬가지로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와 관련해 상복을 벗은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승지(承旨)에 제수되었어도 나아가지 않았으나 결국 동래부사(東萊府使)에 부임하기에 이르렀다.

석호(石湖)는 동래부사로 재임 중에 학교를 수리하고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고 충렬사(忠烈祠)를 중건하였으며 또한 보역청을 설치하여 군병의 요역을 면제하고 포승의 훈련에만 전념토록 하였다. 특히 조총의 사정거리를 늘리고 명중률을 높이도록 개조하는 등 실로 다방면에서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왜관(倭館)의 왜인들이 돌발적인 사건을 일으킨 결과 의금부(義禁府)의 취조를 받고 파직되었으니 때는 1652(효죵 3)년 12월이었다. 윤문거는 결국 동래부사를 마지막 관직으로 마쳤으나 그 이후에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비롯하여 호조참의(戶曹參議), 형조참의(刑曹參議), 공조참의(工曹參議), 경주부윤(慶州府尹), 대사간(大司諫)에 연이어 제수되었음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덧붙이면 석호는 당시 정승(政丞)으로 천거될 수 있을 만큼 그 역량이 뛰어 났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일어났던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내직(內職)은 일체 나아가지 않았으며 외직(外職)인 제천현감(堤川縣監)과 동래부사를 끝으로 관직생활(官職生活)을 마쳤다. 

윤문거는 1655(효종 6)년 부여 석성 증산장에 우거(寓居)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도 대사간(大司諫)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사실상의 관직생활(官職生活)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관직이 제수된 것을 보면 당시 석호가 조정(朝廷)에서 어느 정도 신망이 두터웠는지 여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1657(효종 8)년에도 이조참의(吏曹參議)를 비롯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생활을 멀리하고 초야(草野)에 은거(隱居)하고 싶은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윤문거의 굳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정은 1659(효종 10)년에도 부제학(副提學)을 시작으로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이조참판(吏曹參判) 등에 제수하였으나 석호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669((현종 10)년 8월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으나 이때에도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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