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맹기 서강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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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이 ‘노란봉투법’을 또 다시 들고 나왔다. 2016년 박근혜 정부 때인 19대 국회에서 논의한 내용이다. 21대 국회에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지난 7월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노조파업에서 8165억원의 손실 때문, 그와 관련해 6개 법안이 9월 국회에 논의될 예정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자본을 더 투자하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 동맹’을 강화할 시점에서 다시 프롤레타리아 나라를 염원한다. 그게 노동생산성 향상과 관계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언론보도는 그 진위를 따진 보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우리 경제가 가야할 방향이 제시된다. 그런데 계속 딴죽을 걸고, 갈 길을 막고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스탠퍼드대 마이런 숄츠(Myron Scholes)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9월 5일)에서 ‘한국의 길’로 “경제정책은 파이 분배보다 파이 성장에 초점 맞출 때”라고 했다. 많은 자본을 들여 기술 투자를 늘리고, 기술동맹이 어느 때보다 시급한 시점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국회는 계속 중국과 북한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그들에게 경쟁력 있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산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국회는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법 만들기 공학을 계속 펼치고 있다. ‘노란봉투법’이 또 쟁점이 됐다. “‘노란봉투법’은 2014년 쌍용자동차 파업으로 47억원 손해배상 판결을 받은 노조원을 돕기 위해 시민단체들이 성금을 노란봉투에 담아 보낸 것으로 유래된다(조선일보, 9월 3일).” 그게 다시 수면 위로 올린 것이 문제된다. “더불어민주당이 ‘22대 민생 입법 과제’ 중 하나로 일명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을 우선 추진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민주당 의원들의 관련 발의가 잇따르고 있다. 당 차원 발표가 있던 지난달 31일에는 강민정 의원이, 다음 날인 지난 1일에는 양경숙 의원이 노란봉투법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이미 계류돼 있는 4개 법안(민주당 이수진·임종성·강병원 의원 각각 발의, 정의당 강은미 의원 발의)에 더해 총 6개의 노란봉투법 관련 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는 것이다. 노란봉투법은 노조의 불법 파업으로 인한 손실에 대해 기업이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가압류 청구를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조선일보, 9월 3일).”

대한민국은 소유 주체가 개인(또는 기업)으로 하는 민간자본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국민의 생명, 자유, 재산 등을 국가가 보호해야 할 시점에서 국회가 계속 개인의 재산에 제약을 가하고 싶다. 헌법 제119조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라고 규정한다. 국회의원은 헌법도 읽지 않고 법을 만든다.

그 법이 제대로 될 이유가 없다. 국회가 앞장서니 행정부도 손을 놓고 있다. 감시를 해야 할 곳이 언론인데 언론도 보도만으로 끝난다. 언론은 현실을 제대로 감시하고, 반영할 필요가 있게 된다.

물론 언론도 방송법, 신문법, 언론중재법, 정보통신망법 등으로 꼼짝할 수 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법을 전제정치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했다. 법은 정부와 국회를 위한 것이 아니고 국민을 위한 것이다. 李 전 대통령의 논리라면 국민을 옥죄는 법 그리고 언론법이 많을 필요가 없다. 법 많이 둬야 검사, 판사, 공무원, 대형로펌 등만 살을 찌운다. 그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B.C. 322)가 명료하게 분석한다. 그는 ‘레토릭 술’에서 설득 방법을 크게 3가지로 분류했다. 즉, 에토스(ethos),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등이 그것이다. 마지막 파토스는 ‘열정을 일깨우는 능력(the ability to arouse emotions)’이다. 이것은 청자를 어떤 마음의 프레임에 집어넣는다. 원래 감정은 분노, 공포, 수치, 연민 등 모든 경험적 요소를 갖고 설득하거나, 강제한다. 한편 에토스는 ‘좋은 성격(human character of goodness)’에 속하나 인간은 효용성을 주장함으로써 이기적 인간이 될 수 있다. 대신 에토스는 고귀함(the noble) 등 절대선을 주장한다. 에토스는 주로 화자의 신뢰를 요구하는 덕목이지만, 파토스는 수용자에게 초점이 가해진다. 파토스에 의존하면 포퓰리즘으로 가기 일쑤이다. 에토스와 로고스가 이를 잡아줘야 한다.

최근 중고교 역사교과서 교육시안에 대해 말이 많다. 자유민주당 고영주 변호사가 조선일보 9월 5일자 광고에서 그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국민 여러분, 교과서에 ‘자유와 남침’ 삭제 외, ‘인민민주주의’가 강조된 기막힌 사실을 아십니까?”에서 중고교 역사교과서 시안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윤리와 사상’ 교과서 ‘민주주의’ 단원에서 ‘인민주권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인민’이란 용어를 등장시켰다. 그는 “우리 헌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인 국민주권주의를 부정하고 북한식 인민민주주의의 원리인 ‘수령 1인 독재를 지향하는 인민주권주의’를 가르치고 있다”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로 파토스를 명증성으로 끌어가기를 바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 이성 등으로 설명하면서, 대전제, 소전제, 결론으로 제시한다. 기자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뽑아내고, 분석해 기사를 작성한다. 여기서 언론은 취재관행으로 사실의 정확성, 공정성, 객관성 등을 으뜸 요소로 간주한다. 그게 명증성으로 가기 위한 첫 걸음이다.

물론 언론은 파토스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원래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는 기능을 하게 되면 그 목적이 권력자의 파토스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헌법도 같은 맥락에서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논리가 된다. 법이 많다는 것은 자칫 독재자의 파토스에 빠질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그땐 언론도 나팔수, 선전, 선동, 진지전 구축 외에 할 기능이 없다. 다시 등장한 ‘노란봉투법’을 언론은 꼼꼼히 살펴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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