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8군사령부 전경. 미8군사령부 청사는 일제강점기 보병병영을 재활용한 것으로 1978년 맞은 편 한미연합군사령부(CFC)가 창설되기 전까지 유엔군사령부(UNC)·주한미군사령부(USFK)·미8군사령부(EUSA)가 함께 있었던 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이다. (출처: 용산공원 홈페이지) ⓒ천지일보
미8군사령부 전경. 미8군사령부 청사는 일제강점기 보병병영을 재활용한 것으로 1978년 맞은 편 한미연합군사령부(CFC)가 창설되기 전까지 유엔군사령부(UNC)·주한미군사령부(USFK)·미8군사령부(EUSA)가 함께 있었던 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이다. (출처: 용산공원 홈페이지) ⓒ천지일보

13~14번 게이트 일대 10일 임시 개방

청→일→미 외국군 주둔했던 금단의 땅

[천지일보=김빛이나 기자] 올가을(9월) 정식 개방을 앞두고 오늘(10일)부터 열흘간 임시 개방되는 용산공원(13~14번 게이트 일대)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모이는 가운데 본지는 용산공원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해봤다.

용산공원 홈페이지 자료에 따르면 용산은 고려 말 몽고군의 병참기지로,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는 왜군의 보급기지로 이용됐다. 또한 청일전쟁 이후에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주둔했고, 러일전쟁과 함께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주둔하면서 일본의 무력에 의한 조선지배의 근거지가 됐다.

이후 해방과 함께 미24군단 예하의 미제7사단이 일본군 기지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미군 용산기지가 됐다. 이처럼 용산은 오랜 기간 외국군 주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교통의 중심지였던 용산

조선시대 용산은 서강·마포·두모포·송파와 함께 한강의 수운을 통해 전국 물자가 집결한 장소였으며, 숭례문(崇禮門)과 동작진(銅雀津)을 연결해 시흥·군포·수원으로 가는 남행길목이었다.

한양 천도 후 용산에는 군량미 조달을 위한 둔전(屯田), 군수 식품의 저장·출납기관인 군자감(軍資監), 선혜청(宣惠廳)의 창고인 만리창(萬里倉), 기와·벽돌을 만들던 와서(瓦署)가 있었다.

남산(목멱산)의 산세와 연결된 용산은 삼각산(三角山)과 관악산(冠岳山)을 연결하는 녹지축 역할과 한강의 수운으로 강북이 연결되는 지형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만초천(蔓草川: 덩굴내)은 자연스러운 선형이었고, 당시 경관은 용산팔경(龍山八景)의 3경에 ‘만천해화(蔓川蟹火: 만천의 게잡이 불빛)’로도 표현됐다. 또한 만초천은 ‘무악천(毋岳川)’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인왕산 옆의 ‘무악’에서 발원해 흐르는 것에서 유래됐다.

(출처: 용산공원 홈페이지) ⓒ천지일보
(출처: 용산공원 홈페이지) ⓒ천지일보

◆개항기, 외국인 거주자 증가

1883년 주한일본공사는 구용산(舊龍山: 원효로 3가와 4가) 일대가 양화진보다 도성에 가까웠기에 거주와 통상의 유리함을 들어 개시장(開市場: 조선 후기 대외무역시장)으로 개방했다. 이로 인해 용산 일대에는 일본인을 포함해 외국인 거주자가 자연스럽게 증가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 병참기지로

용산에는 청일전쟁(1894년)시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주둔했고, 러일전쟁(1904년)시에는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와 20사단이 주둔해 일제의 병참기지로 변모했다.

1904년 조선주차군사령부는 한일의정서 제4조 규정을 근거로 용산 일대 115만평을 강제 수용한 후 토지 매매를 일체 정지시키고 위수지역으로 선포했다.

1906년 연병장에서 한강통에 이르는 대로와 삼판통(三坂通)에서 계행사에 이르는 주요 도로가 완성됐다. 세부도로는 군사시설 용도에 따라 구축됐다. 이후 1918년까지 군사시설이 집중적으로 조성됐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07년 4월 사격장이 들어섰고, 1909년 4월 보병여단사령부청사와 같은해 9월 육군위수형무소(위수감옥)가 세워졌다. 1908년 1월 보병 78연대 병영, 7월 한국주차사령부, 9월 조선주차사령관사, 9월 위수병원, 10월 사단장 관사, 11월 육군창고, 11월 용산병 기지창, 12월 사단사령부청사 등이 들어섰다.

조선총독부는 1897년 경인철도인수조합(京仁鐵道引受組合)을 결성해 미국인 제임스 모오스가 따낸 경인철도 부설권을 양도받았다.

이후 인천-용산-한성을 연결하는 군사상 목적의 침략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1900년 7월 최초의 근대식 교량으로 한강철교를 준공했다.

◆용산역 건설로 인한 신용산 시대

일제 경무총감부는 러일전쟁 후 만주까지의 군용철도 속성공사를 위해 육군임시 철도 감부를 조직했고, 1900년 8월에 경성역-인천역간 전노선 26마일을 개통했다.

철도 관련 종사자(철도도감 장병, 노무자)들로 용산 일대가 활기를 띠었고, 이때부터 신용산시대가 시작됐다.

초기 용산역사는 1899년에 지은 3.5평의 바락조 건물이었다. 이후 1906년 887평의 2층 북유럽풍 목조건물로 신축됐다. 1908년에는 통감부 철도관리국이 용산역 앞으로 이전해 용산 신시가지 형성이 본격화됐다.

만초천은 욱천(旭川)으로 개칭됐고, 형태도 주변 지역의 도시화와 병영의 입지로 직선으로 변형됐다. 일본군의 사격장 조성으로 남산 산록과 연결된 물길 단절됐고, 1925년 을축년 수해 때는 저층지대인 철도부지와 용산역 일대, 사우스 포스트의 하단부가 대부분 침수되기도 했다.

[서울=뉴시스] 7일 대통령실 앞 용산공원이 공개되고 있다. 정부는 오는 10일부터 19일까지 용산공원 시범개방에 앞서 공원 현황, 시범개방 취지 설명 등을 위해 기자단에게 현장 방문을 지원했다. 2022.06.09.
[서울=뉴시스] 7일 대통령실 앞 용산공원이 공개되고 있다. 정부는 오는 10일부터 19일까지 용산공원 시범개방에 앞서 공원 현황, 시범개방 취지 설명 등을 위해 기자단에게 현장 방문을 지원했다. 2022.06.09.

◆해방 이후 미군 주둔지로

1945년 해방과 함께 미24사단은 일본 기지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용산에 정착했다. 미군의 용산 점유는 서울 시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군부대를 통해서 나오는 원조물자와 ‘미8군 무대(미군 사령부가 주한 미군 및 군속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마련한 위문공연)’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대중문화에 영향을 끼쳤고, 미군부대 주변 지역에는 화랑가가 형성됐다.

◆용산공원 조성 후 변화 시작

1970년대까지 용산은 지리적으로 도심에 인접했으나, 서울의 심리적 변방과 외인지대로 여겨졌다. 하지만 1991년 미군골프장 지역에 용산가족공원이 조성되면서 변화되기 시작됐다.

용산기지 반환 논의는 서울 인구의 급증과 교통 불편에 대한 민원이 지속해서 제기되면서 이뤄졌다.

2003년 한·미정상간 용산기지 이전합의를 계기로, 2004년 용산기지이전협상 국회비준을 거쳐 2005년 국가 도시공원 조성 발표 및 2007년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노력이 지속됐다.

2004년 2월 국무총리실에 용산기지이전 및 공원조성을 위한 자문기구인 ‘공원화기획자문위원회’가 출범했다. 이후 2005년 7월 그 활동을 마칠 때까지 용산 반환부지의 활용방안 및 공원조성방향 논의 등과 관련한 정부의 자문역할을 수행했다.

2005년 11월에는 국무총리 및 민간위원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용산민족·역사공원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됐다. 2007년 12월 위원회 임기가 끝날 때까지 8차례 회의를 열면서 용산기지 공원화 추진과 관련한 주요 정책사항들을 심의했다.

용산가족공원. (출처: 용산공원 홈페이지) ⓒ천지일보
용산가족공원. (출처: 용산공원 홈페이지) ⓒ천지일보

정부는 2006년 4월 국무총리실에 용산공원화 사업을 실무적으로 담당할 ‘용산민족·역사공원건립추진단’을 설치해 ‘용산민족·역사공원건립추진위원회’의 활동을 지원하고 공원조성사업에 대한 국민공감대 형성을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했다.

2008년 1월 1일부터는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이 제정·시행됨에 따라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에서 공원조성 업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됐다. 2011년 10월 공원조성의 기본구상인 종합기본계획을 수립했고, 2014년 변화된 여건 등을 반영해 계획이 한 차례 변경됐다.

2019년 9월 용산공원조성추진위원회가 총리소속으로 격상돼, 12월 제1차 용산공원조성추진위원회가 개최됐다.

꾸준한 노력 끝에 2021년 4월에는 반세기 넘게 일반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던 용산 ‘옛 방위사업청 부지’가 ‘용산공원 국민참여단’에 최초로 공개됐다. 옛 방위사업청 부지는 용산기지 북측에 위치하고 있고, 용산공원 조성지구와 경계가 맞닿아 있다. 옛 방위사업청은 서울광장 면적의 7배에 이르는 약 8만 6890㎡ 규모의 군사시설로, 용산공원에 편입됐다.

정부는 지난 3일 주한미군으로부터 용산기지 남서쪽 지역과 13~14번 게이트 일대를 반환받았다.

해당 부지는 용산 대통령실을 둘러싸고 있는 부지로, 넓이는 5만 1000㎡다. 그간 반환된 규모에 해당 부지를 포함하면 전체 용산기지 면적(203만㎡) 가운데 약 30%인 63만 4000㎡가 한국 정부에 반환된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모습. (출처: 연합뉴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모습. (출처: 연합뉴스)

용산기지 남서쪽 지역과 13~14번 게이트 일대는 원래 주한미군을 위한 숙소·학교 및 야구장으로 활용됐다. 대통령실은 이번 반환받은 부지를 대통령 집무실과 연결된 용산 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날 시범 개방되는 곳은 서울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에서부터 장군 숙소와 대통령실 남측 구역을 지나 스포츠필드(국립중앙박물관 북측)에 이르는 직선거리 약 1.1㎞ 구간이다.

대통령 경호 특수차량 등 장비를 볼 수 있는 대통령실 앞뜰은 15분 간격으로 방문 가능하며, 40명씩 선착순으로 미리 번호표를 받아 들어갈 수 있다.

이번 시범 개방에 대해 국토부는 “국민들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개방을 준비했다”며 “환경 위해성 우려가 있는 지역은 개방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도로포장 등을 통해 토양의 직접적인 인체접촉을 최대한 차단했다”고 밝혔다.

용산공원 시범개방. 시설 안내도. (출처: 용산공원 시범개방 공식 홈페이지) ⓒ천지일보 2022.6.10
용산공원 시범개방. 시설 안내도. (출처: 용산공원 시범개방 공식 홈페이지) ⓒ천지일보 202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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