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AP/뉴시스] 28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드보르초바야 광장에서 러시아 군인들이 다음 달 9일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7주년(전승절) 퍼레이드를 앞두고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AP/뉴시스] 28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드보르초바야 광장에서 러시아 군인들이 다음 달 9일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7주년(전승절) 퍼레이드를 앞두고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천지일보=이솜 기자] “우리는 더럽고 피곤했고, 주변 사람들은 죽어갔습니다. 나는 이 침공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부였습니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들 중 한 하급 사관이 전쟁을 그만두고 러시아로 다시 돌아온 사연을 CNN방송이 22일(현지시간) 전했다. 

사관은 2월 24일 침공 전 세계적 우려를 촉발시킨 러시아 서부 국경에서의 대규모 병력 증강이 이뤄진 현장에 있었다. 

CNN 인터뷰에 따르면 2월 22일, 러시아 남부 크라스노다르에 주둔하고 있던 사관과 나머지 대대는 아무런 설명 없이 휴대전화를 반납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에도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들은 군용 차량에 흰 줄무늬를 칠하는 데 몇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를 다시 씻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관은 “지시가 변경됐다. 조로처럼 ‘Z’를 그리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침공 전날 사관과 대대는 크림반도로 끌려갔다. 그는 “솔직히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될 줄 전혀 몰랐다”고 밝혔다. 그의 부대가 2014년 러시아에 합병된 우크라이나 지역인 크림반도에 집결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월 24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관은 자신과 동료들은 휴대전화도 없이 외부 세계와 연락을 끊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틀 후 사관은 스스로 우크라이나에 진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어떤 군인들은 노골적으로 거절했다고 사관은 전했다. 그는 “그들(거절한 사람들)은 보고서를 쓰고 떠났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남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다음날 우리는 (우크라이나로) 떠났다”고 설명했다. 

이 사관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일부이며 탈나치화가 필요하다’는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주장은 전투 요청을 받은 병사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많은 군인들이 이 모든 게 무엇 때문이고 우리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외교적 해결을 희망했다”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데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부대가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과 함께 국경을 넘은 뒤 이 사관이 가장 먼저 기억하는 모습은 러시아산 건식 배급 상자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부서진 장비들이 쌓여 있는 장면이었다.

그는 권총 한 자루와 수류탄 두 개를 꽉 쥐고 트럭에 앉아있었다. 그들이 마을에 다가갔을 때, 채찍을 든 한 남자가 뛰어나와 호송차를 채찍질하며 러시아군에 욕을 퍼부었다. 사관은 이 장면이 자신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기억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우리는 현지인들을 봤을 때 긴장했다. 그들 중 몇몇은 옷 속에 무기를 숨겼고 가까이 다가가면 총을 쐈다”고 말했다.

이 사관은 왜 그들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위해 보내졌는지를 걱정하거나 혼란스러워하는 유일한 군인은 아니라고 CNN에 말했다. 다만 그는 또한 곧 전투 보너스가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약간의 활기를 띠었다고 기억했다. 사관은 “누군가에게서 ‘오, 여기서 보름만 더 있으면 대출은 다 갚겠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말했다.

사관은 몇 주 후 후방으로 배치돼 장비들을 수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그곳에서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더 잘 알게 됐고 반성할 시간과 에너지를 더 갖게 됐다. 사관은 “우리는 라디오 수신기로 뉴스를 들을 수 있었다”며 “러시아에서 가게들이 문을 닫고 경제가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우크라이나에 왔기 때문에  더 죄책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후 사관은 전쟁을 그만 두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사령관을 찾아가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군복무 거부는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사령관은 이 사관에게 “형사사건이 있을 수 있다. 거절은 배신이다”고 경고했지만 사관은 입장을 고수했고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전쟁 중인 러시아 군대에서 이탈은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는 형사 범죄다. 그러나 군인들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한 특수작전에 참여하는 데 동의하겠다는 계약서를 작성한 적이 없기 때문에 퇴역 후 10일 이내에 퇴역 동기에 대한 설명과 함께 사임할 법적 권리가 있다.

[하르키우=AP/뉴시스] 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외곽 마을에 러시아 군인으로 보이는 시신들이 러시아 침공의 상징인 'Z'로 배열된 채 놓여 있다.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이 전투를 이어가는 동안 하르키우 외곽에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신들이 즐비해 흡사 야외 영안실 같은 느낌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르키우=AP/뉴시스] 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외곽 마을에 러시아 군인으로 보이는 시신들이 러시아 침공의 상징인 'Z'로 배열된 채 놓여 있다.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이 전투를 이어가는 동안 하르키우 외곽에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신들이 즐비해 흡사 야외 영안실 같은 느낌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터 거부하는 러시아 군인들

CNN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이 낮은 사기와 큰 손실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서방 관리들의 평가를 인용하며 이 같은 사연을 가진 러시아 군인이 많을 수 있다고 예측했다. 

발렌티나 멜니코바 러시아 군인어머니위원회 집행비서관은 “우크라이나에서 전투를 거부한 병사들이 많이 있다”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정보국은 몇몇 러시아 부대 특히 남부의 한 사단의 경우 병사 중 60~70%가 복무를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권운동가이자 러시아 징집병을 돕는 단체의 이사인 알렉세이 타발로프는 군에서 물러난 군인 2명을 직접 상담했다고 CNN에 밝혔다. 타발로프 이사는 “전투를 거부하고 우리에게 온 군인은 2명이었지만 이들이 떠난 여단에서는 30명이 전투를 거부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기관들의 간접적인 정보를 포함, 모든 사례를 추정하면 전투를 거부한 군인 수는 1000명을 넘는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시작된 후 군인 수천명이 우크라이나에서 목숨을 잃었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의 인명 피해를 2만 2천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 3월 25일을 마지막으로 손실 상황을 더 이상 보고하지 않았다. 당시 135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러시아에서 신병은 여전히 모집 중이다. 

이 사관은 지금 그의 가족과 함께 있다. 그는 “다음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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