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1631)년에 태어난 관리의 친모모임을 담은 그림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2.5.18
신미(1631)년에 태어난 관리의 친모모임을 담은 그림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2.5.18

궁중서 매년 정기적 ‘연향’ 실시
사대부 술자리인 ‘계회’도 열려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사회와 직장 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회식(會食)’ 문화다. 친목과 사기 도모가 목적이겠지만, ‘또 다른 근무’로 여겨 심각한 스트레스와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그나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의무적인 회식이 감소하고 가정을 돌보는 문화가 조금씩 생겨났었다. 하지만 코로나19 거리두기 해제와 함께 회식문화가 부활하면서 직장인들의 고충이 다시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역사 속에 담긴 회식문화를 살펴봤다.

◆국가가 모임 주도하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국가보다 조직과 집단주의를 강조하고 있기에 회식문화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조선의 경우 궁중에서는 매해 정기적인 ‘연향(宴饗)’이 실시됐다. 경국대전에 보면, 연향은 국가에서 실시하는 각종의 ‘대소연향(大小燕享)’과 외국 사신의 접대를 위한 ‘연회(宴會)’로 구분된다. 또 사대부들의 술자리인 계회(契會), 아회(雅會), 기로회(耆老會) 등이 이뤄져 왔다.

정례적으로 행한 연향 가운데 가장 성대한 것은 ‘회례연’이었다. 이는 설날과 동지(冬至)에 임금이 신하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베푼 연회로,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했다. 중궁전(中宮殿)에서도 내외명부를 위한 회례연이 열렸다.

세종실록(세종 15년 1월 1일)에 보면, ‘임금이 근정전으로 나아가서 회례연을 베풀었는데,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사용하였다. 중궁(中宮)이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이 공식 행사에서 아악을 사용한 것은 의미가 크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다 바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세종 12년 12월 7일)’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세종은 유교 문화권인 조선이 주변국보다 더욱 우월한 문명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의지를 반영해 아악을 발전시켰고, 회례연에서 그 결과물을 선보여 조선의 높은 정신문화를 알렸다.

◆모두가 풍요로운 삶 원해

개혁군주인 정조대왕(조선 제22대 왕)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늘날 수원 남문시장에는 정조대왕이 술을 따르고 있는 모습을 한 ‘불취무귀(不醉無歸)’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는 정조대왕의 일화에 나온 사자성어로,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정조 16년 3월 성균관 제술 시험 합격자들과 희정당에서 연회가 베풀어진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합격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면서 이같이 말한다.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정조대왕이 애주가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는 실제로 술 취해서 돌아가라는 의미보다는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술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중요한 모임은 그림으로 남겨졌다. 조선시대에는 문인들의 모임인 계회(契會)를 그림으로 담아냈다. 또 ‘신미(1631)년에 태어난 관리의 친목모임’ ‘무인(1758)년에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친목 모임’을 담은 그림은 시대적인 결속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회식의 대부분 권위 있는 계층에 의해서 이뤄져 왔다. 맨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통제하는 형태가 대표적인 회식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 코로나19로 회식문화가 감소했고, 개인과 가정을 챙기는 문화가 형성돼왔다. 현재는 사회적 거리두기 해소로 친목 모임이 다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선 강요는 오히려 근무환경에 고통을 더할 수 있다. 이에 건강도 챙기면서 주변과 소통하는 회식문화가 하루빨리 정착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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