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인천언론인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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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도시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했던 스페인 출신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은 지구촌 네트워크 사회의 출현을 일찍이 예측했다. 그는 인터넷 대중화 이후 거대한 수평적 소통체계의 작동으로 ‘문명의 풍경’이 바뀌는 현실을 직시했다.

시간과 국경을 초월해 정보를 상호 연결해주는 ‘노드’가 점점 중요해지고, 유튜브나 인플루언스와 같은 노드들의 집합이 네트워크 사회를 구성하고 있음을 생생히 지켜보고 있다. 정보 전달의 속도는 획기적으로 높아졌고, 노드의 활동 범위는 전 지구적으로 확대됐다. 팬데믹 시대를 맞아 순식간에 비대면과 온라인 일상이 익숙해졌음에 놀라면서 국가 권력보다 훨씬 강력해진 네트워크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

개방성, 유연성, 복잡성, 종합성, 연결성이 뛰어난 21세기 네트워크에 가담할 생각은 없다. 수년 전 페이스북에 가입하고서도 그간 호기심으로 2, 3건의 글을 올렸을 뿐이어서 1인 크리에이터는 언감생심이다. 영상 편집에 자신이 없기에 정보 생산자나 공급자이기를 포기하고 그저 소비자에 머물고 있다. 그렇지만 오프라인 세상에서의 네트워크는 중시하고 있다. 일주일 전 충남 무창포 바닷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가 평생 최고가를 주고 눈길 끄는 작품을 구입했다. ‘봄날’이란 작품을 집에 갖고 오니 거실 풍경이 달라졌고, 마음도 화사해진다. 전시회 뒷풀이 때 누군가 갖고 온 부활절 달걀의 아기자기한 장식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초파일을 앞두고 팔만대장경이 판각된 사찰인 인천 강화도 선원사(사적 제259호)를 주말에 다녀왔다. 필자는 1994년부터 이 사찰의 주지 스님과 인연을 맺으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하고 있다. 28년 전 처음 선원사를 찾았을 당시 초가집 뒤 야산의 선원사 터는 황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로 사적지로 지정됐으나 나무와 잡풀이 우거진 황무지 상태였다. 인근 전등사에 머물던 주지 스님이 꿈속에서 노스님의 계시를 받고 선원사 터 우물 속에서 고려시대 맷돌을 발견한 이후 사찰 복원을 위한 천일기도를 초가집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강화도 지역구 국회의원으로부터 제보를 받아 기사로 소개했던 게 엊그제 같다. 이듬해 국고 지원으로 동국대 박물관팀이 선원사 터 발굴작업을 시작해 5차에 걸쳐 사찰 기단, 기와 등 귀중한 유물을 수습했다.

강화도는 고인돌, 고려 왕궁, 조선시대 방어진지, 구한말 한옥교회 등 선사시대에서 근현대까지 귀중한 문화유산을 풍부히 간직한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고려시대 유산으로만 쳐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 판각지 선원사 터를 비롯해 몽골에 대적하기 위해 쌓았던 외성, 중성, 내성 등 삼중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한에 있는 5기의 고려 왕릉 중 4기가 강화도에 보존돼 있어 경주나 부여처럼 고도(古都)로서의 가치가 높다.

선원사 스님은 종교를 초월해 강화도 가톨릭대 총장님과 의형제를 맺고 교우했는데, 어느 날 총장님이 행글라이더를 타다 불의의 사고로 타계했다. 스님은 또 도농교류사업을 위해 강화도로 이사 온 목사님에게 오리 농법을 주선해줬다. 인천지역 민주화운동 대부격으로 활동했던 목사님은 강화도에서 유기농법을 꾸준히 전파하고 있고, 신토불이 식품을 학교 급식으로 보급하자는 캠페인을 선도했다. 지난해 여름엔 주택재개발정비계획으로 인해 역사적 장소인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이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한 달 넘게 단식투쟁에 나섰다, 필자와 스님이 함께 단식 현장을 찾았을 때 물만 드시고도 눈빛과 목소리에서 강렬한 에너지를 품어냈고 노동유산 보존을 위한 결기 또한 대단했다.

스님이 소개해준 강화도 육필문학관 관장님 덕분에 시 낭송을 해보고, 신선한 문학기행에 나서며 강화도에 정착한 여러 문화예술인을 만날 수 있었다. 선원사를 통해 만난 인연과 사람들은 참으로 소중하다. 함석헌 선생이 평생 강조했던 ‘씨알’과 같은 존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30년의 세월 동안 서로 어울리고, 따듯한 온기를 나누는 ‘씨알 공동체’가 형체 없이 형성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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