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히 드문 컬러사진에 담아
생계 위해 위험 무릅 쓴 일상
지금은 향수를 안기는 추억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6.25전쟁 휴전 직후 1954년 우리나라의 경제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컬러사진 2점을 단독 공개한다. 이 사진은 미국 종군기자가 촬영한 것으로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로부터 본지가 입수했다.
미 종군기자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해 전쟁터를 오가며 수만장의 사진을 촬영했고, 휴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경기도 일대를 다니며 촬영했다. 특히 당시 컬러필름은 상당히 귀하던 때며 1950년대에 컬러사진으로 남긴 사진들은 극히 드물었던 시대라 희소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본지는 앞서 종군기자가 수원과 인천에서 찍은 컬러사진을 공개한 바 있다.
이번에도 ‘보릿고개’를 겪은 어른 세대들에게 향수를 자극할 사진이다. 시내버스가 비포장도로로 된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 모습인데, 안에는 사람이 꽉 찼고 안내양이 문밖에 매달린 채 움직이는 만원(滿員) 버스다. 정류장에서 막 출발한 버스의 모습을 종군기자가 렌즈에 담은 것이다.
미군이 남기고 간 차량을 개조해 만든 버스로 차량정면에는 ‘대한’이라는 글자와 별4개 마크가 있다. 앞쪽에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며 운전석 바로 옆까지 승객이 탔을 정도로 정원(定員)이 훨씬 초과된 상태로 버스가 달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물론 정원 개념이 없었을 테고 버스도 배차가 많지 않았던 시대라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타려 했을 것이다. 안내양은 사람들을 몸으로 밀착시키며 최대한 안으로 밀어 넣고, 출입문 계단에 발을 올려놓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힘껏 창문을 붙잡고 있다. 한쪽 어깨에 메고 있는 건 버스표를 받아 넣는 지갑이다. 딱 봐도 위험천만한 모습이지만 당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이었다. 안내양은 대부분 여학생들이 학비를 벌기 위해 일했던 직업 명칭이었다. 여학생들이 많이 하다 보니 안내하는 사람의 호칭을 의미하는 ‘안내양’이 된 것이다.
안내양은 1961년 교통부가 여차장제를 본격 도입하면서 전국 어디서든 볼 수 있었고, 1980년대까지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었던 버스 풍경이었다. 1990년대 이후 사라져 지금은 볼 순 없으나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도 등장해 다소 익숙할 수 있다. 안내양이 사람을 다 태운 후 버스에 올라타며 옆 차체를 손으로 ‘탕탕’ 치면서 “오라이”라고 외치는 모습은 이제는 추억이 됐다.
사진은 안내양이 본격 도입되기 전 모습으로 유니폼도 갖춰 입지 않던 시절이다. 안내양이 차밖에 매달려서 가는 모습만 봐도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던 당시의 고초가 어떠했는지 느껴진다. 1960~70년대에도 간혹 만원버스에 매달려 가는 안내양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군기자가 사진을 남긴 이때는 전쟁 직후라 대중교통 수단이 버스 외에는 거의 없었던 데다가 버스차량도 크지 않다 보니 웬만하면 안내양은 매번 만원버스에서 일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도로상태도 좋지 않았다. 따라서 가장 극한의 직업 중 하나였던 셈이다.
또한 이들은 최대한 사람들을 많이 태우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밀착시켜 억지로 밀어 넣는 일도 다반사였다. 여성으로서 수치심을 느낄 겨를도 없이 ‘보릿고개’를 견뎌야 했던 일상이었다. 정원 이상을 태우고 차에 매달려 가는 모습이나 안내양이 온몸으로 승객들을 밀어 넣는 모습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당시 모습조차 종군기자에는 생소한 풍경이었기에 사진에 담은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힘든 일을 해왔던 안내양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누군가에겐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겪었던 모습이다.
또 한 장의 사진은 시내 거리 풍경이다. 거리 도로가 포장이 돼 있지 않아 차가 지나간 자리는 바퀴자국이 선명하고 마치 진흙처럼 퍼져 있다. 사진관을 의미하는 ‘예술사장’ 간판과 ‘미장원’이라고 써져 있는 간판이 보인다. 오른쪽은 버스정류장으로, 사람들이 버스에 줄지어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버스의 뒷모습은 앞에서 본 사진과 같은 버스 차량이다. 버스 뒤에는 트렁크 역할을 하는 짐칸이 임시로 만들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번 사진 역시 기성세대에게는 공감과 향수를 느끼게 하고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한 옛날의 우리나라 생활상을 알게 해 준다. 이방인 종군기자가 사진 기록물로 남겨준 덕분에 우리가 힘들게 살아왔던 과거를 돌아보게 해주는 선물 같은 사진인 셈이다.
한편 당시 미국 종군기자들은 8명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열린 바닷길을 통해 입국했는데 이들은 전쟁과 피난민들의 참혹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당시에는 컬러 사진이 귀했기 때문에 이들은 중요한 순간에만 컬러로 찍었다. 이들이 가장 많이 컬러에 담았던 사진은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이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심리전을 펼치는 장면들이었다. 표정을 더 생동감 있게 담는 데에 컬러사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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