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맹기 서강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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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경제 관련법은 피해자와 가해의 이익, 가치 등의 호혜적 관계 개선 그리고 사회적으로 재발을 방지하고자 만든다. 거시적 측면에서도 산업이 육성돼야 그 법도 오랜 효력을 발휘한다. 법만 존재하고, 산업이 죽으면 그 법도 곧 수명을 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좋은 법은 재발 방지뿐만 아니라, 산업이 육성할 수 있으면 누구도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은 국회가 만들어낸 법 중 가장 말썽이 많은 법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말도 험상궂다. 국회나 법원이 권력기구이면 수긍할 수 있는 측면이 있으나, 국회와 법원은 폭력 집단도 아닌데 말이다. 무릇 법은 원래 국민들의 입장에서, 국민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지, 청와대, 국회, 법원 등 권력기구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최근 터무니없는 법이 쏟아져 나와 그들의 법 공학정신은 이해하겠는데, 국민에게 도움을 줄지 의문이다.

법이 많아 사회가 혼란스럽다. 검찰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수사하고, 법관은 ‘법과 원칙’에 따라 재판한다고 한다. 그걸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권력의 시녀로서 법을 만든다. 문재인 청와대는 노동자, 노동조합원의 정부를 자처한다. 중대재해법은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 협력업체 비정규직 고(故) 김용균 씨가 사망하면서, 이 법의 필요성이 회자됐다. 국회 앞에 피켓 시위가 벌어졌다. 586 운동권 청와대는 분노했다. 청와대·국회 등 586 세력들에게 큰소리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촛불정신’ 앞에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기업가 정신은 아예 실종된 지 벌써 오래전 일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 헌법정신이 위기를 맞는다.

자본가 정신이 사라지면, 국민의 생명, 자유, 재산권이 상대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검찰과 법원은 한술 더 떠 고무줄 조사, 판결로 예측 불가능한 사회를 도래케 했다. 범죄 사실이 직시돼 기업주가 구속이 되면 곧 기업은 국유화의 길을 걷게 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변동의 가장 민감한 부분의 처벌법이다.

자본가 처벌의 수위 조절에 시간이 걸렸으나, 지난해 1월 국회에 통과돼, 2022년 1월 27일 시행에 들어가 이제 1개월 반이 넘어간다. 기업주들은 계속 긴장한다. 그들은 사업이 아니라, 서청대 담장을 넘나들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됐다.

과거에도 ‘산업안전보건법’이 존재했다. 그 법은 안전보건 규정을 위반할 경우에 한해서만 사업주를 처벌했다. 그러나 중대재해법은 사업주에게도 법적 책임을 묻도록 했다. 그들이 혐오하는 자본가의 배려가 있을 이유가 없다.

현행법은 “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 원 이하의 벌금이 처해진다. 법인에는 50억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는 등 징역과 벌금이 동시에 처해진다. 그 중 기업이 위반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해당 업무에 관해 상당한 주의와 감독을 게을리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벌금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예외조항이 있긴 하다. 특히 현행법의 처벌이 쉽게 이뤄질 수 있는 영역은 건설업종이다. 건설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건설업은 아무리 안전관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불의의 사고가 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건설현장은 산업이 위축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현실성을 고려하고 법을 만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된다.

논쟁이 경찰, 검찰, 법원으로 넘어가면 사회 갈등이 증폭된다. 그 책임 한계도 불분명하다. 선동 정치인은 법을 만든 후, 떠나고 피해 당사자, 법조와 변호사 간의 지루한 공방이 계속된다. 더욱이 ‘위헌 소송’까지 걸려 있다. 고용주는 ‘자기 책임’인지가 명확하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고용주가 법적 책임을 모두 져야 한다면 586세력의 자본가 혐오증과 겹치는 부분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중대재해법은 산업 육성과는 거리가 멀다. 법의 취지는 노동자의 재해를 줄이고, 사업가는 안전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양자가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사업장에서 신기술과 새로운 기계로 대치시킬 수 있는 부분도 찾을 수 있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다. 또한 노동조합의 집단이기주의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한편 그 법으로 일자리가 줄어들게 만들고, 경제에 충격을 준다면 그 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원론적으로 행위자의 행위는 시간과 공간에 제작을 받는다. 노동자가 자본가를 적(敵)으로 보면 그들의 만족도를 극대화시킬 수가 없다. 노동자의 필요와 고용주의 필요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다. 호혜적으로 맞물린 분업 사회는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노동자의 잘못을 고용주에게 넘기는 것도 문제이지만, 고용자의 잘못도 노동자에게 넘길 수 없다. 더욱이 어떤 사고이든, 책임 문제가 불분명하면, 항상 갈등이 일어난다. 서로의 관용이 없는 사회가 눈앞에 보이게 된다.

법원은 심판자로서 중재할 필요를 갖게 된다. 중재해야 할 법원이 권력기구로서 이념과 코드에 의해 지배되면 그 사회는 바른 호혜적 교환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 조건은 서로 좋은 방향으로 적응하게 한다. 국회가 그들의 권력을 연장할 속셈으로 법을 만들면 권력이 지난 자리에는 심성들이 황폐화되고, 시장의 질서가 무력화된다. 또한 권력자가 맛을 들이면 계속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 조직 구성원은 역할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다. 권력자는 직위를 나눠주고, 충성심을 강요한다. 선동 정치인은 임기가 바뀔 때마다 ‘적폐’ ‘숙청’의 방식을 택하면서, 혁명적 방법을 선택한다. 권력이 지나가고 난 후 황폐한 현장이 나타난다. 더욱이 헌법상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주의 국가에서 법의 힘으로 권력을 잘못 휘두르면 그 권력으로 인한 후일 나쁜 평가를 받게 된다.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 국회는 왜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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