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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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통치권자의 패션은 곧 그의 리더십과 직결되는 문제로 김정은은 집권 초기 주로 할아버지 김일성을 롤 모델로 치장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롤 모델이 바뀌어 주목되고 있다. 얼마 전 김 총비서가 평양 화성지구 1만 세대 주택 건설 착공식에서 선보인 카키색 점퍼, 선글라스 패션이 화제가 되고 있다. 평소 김 총비서가 잘 입지 않던,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떠올리게 하는 패션을 하고 나서서이다. 김 총비서는 후계자 지명 단계에서부터 집권 초기까지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을 닮은 외모로 주목을 끌었다. 인민복 혹은 검은색 오버코트를 입거나 중절모, 뿔테안경 등 아이템을 사용한 게 대표적이다. 은둔형 지도자인 아버지보다는 포용적 이미지의 할아버지를 롤 모델로 삼으려 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런 김정은 총비서가 아버지를 떠올리는 복장으로 나선 것은 올해 광명성절(김 위원장 생일 2월 16일) 80주년을 ‘성대하게 경축’하기로 한 것과 관련 있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혈맹’인 중국의 올림픽 기간과 겹쳐 전략 무기를 과시하진 못했지만 김정일 위원장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삼지연시에서 중앙보고대회를 여는 등 나름 경축 방식을 고심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김 총비서의 김정일 패션 따라 하기는 내부 결속에 초점을 맞춘 광명성절 이벤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10년 이상 집권 기간 생긴 지도자로서의 자신감을 아버지의 이미지를 투영해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다가오는 태양절(김일성 주석 생일 4월 15일)에 김 총비서는 김 주석을 떠올리는 패션을 하고 나타날까.

앞서 언급한 대로 김 총비서는 후계자 지명 때부터 김 주석의 외모, 패션을 따라 하는 듯했다. 만약 그가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복장을 하고 나오더라도 이질감은 없을 것이다. 대표적인 게 인민복이다. 김 총비서는 2010년 9월 당 대표자회에 후계자 신분으로 처음 인민복을 입고 나타났다. 김정일 위원장은 당시 색만 다른 인민복을 착용했다. 인민복은 원래 김 주석이 입기 시작했으니, 이 복장으로 김씨 일가의 권력의 승계와 정당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 김 총비서는 이후 주요 회의나 현지지도에서 검은색 인민복을 자주 착용하며 자신의 패션으로도 소화한 듯했다. 특히나 김 총비서가 인민복을 ‘국경 밖’에서 입을 땐 더 화제가 됐다. 2018년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그랬다. 당시 김 총비서는 양복을 입을 것이란 일각의 전망과 달리 인민복 차림으로 나섰다. 폐쇄적 국가의 이미지를 벗어나는 것보다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의 고유모습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뒀다는 해석이 뒤따랐다.

2019년 4월 북러 정상회담에서는 김 주석을 쏙 빼닮은 모습으로 등장했던 김 총비서였다. 검은색 오버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그는 코트 안쪽에 오른손을 넣는 김 주석의 버릇까지 재현했다. 이처럼 김 총비서는 오히려 다른 나라 정상들을 만날 때 체제 기반과 정통성을 더 부각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김 총비서가 독자적인 패션 스타일을 구사하기 시작했다고 평가받게 된 대표적인 패션은 트렌치코트 혹은 가죽 롱 코트다. 선대에서는 시도한 적 없는 패션이라 김 총비서가 정권에 대한 자신감을 표명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려는 것이란 분석들이 있었다. 김 총비서는 2019년 11월 초대형방사포 시험사격 참관에서 처음 가죽 롱 코트를 입었고 이후 순천린비료공장, 삼지연시 등 주로 야외 시찰에 입고 나왔다.

가죽 롱코트가 더욱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작년 1월 8차 당 대회 기념 열병식에서 김여정·현송월 당 부부장, 조용원 당 조직비서 등 김 총비서의 최측근들이 똑같이 입고 나오면서부터다. 당시 가죽 롱 코트는 김 총비서의 측근에게만 허용된 복장이라는 설이 돌았다. 특히 김덕훈 내각총리는 올해 총 5번의 경제 시찰에서 모두 가죽 코트를 입고 나타났다. 그가 유독 ‘경제’ 시찰에서만 가죽 코트를 입는 것은, 경제 현장에서만큼은 김 총비서의 대리인이라는 의미를 부각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많다. 북한에서 가죽옷은 보통 옷이 아니다. 그러나 김정은이 유행시킨 가죽코트는 마치 김정일 위원장의 점퍼 옷처럼 북한 인민들 속에 유행될 날도 멀지 않다. 북한의 장마당 경제는 패션의 일반화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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