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티=AP/뉴시스] 6일(현지시간)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카자흐스탄의 한 공항에 도착해 군용기에서 내리고 있다. 반정부 시위 진압에 실패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러시아 주도 군사동맹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에 평화유지군 긴급 파병을 요청했다.
[알마티=AP/뉴시스] 6일(현지시간)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카자흐스탄의 한 공항에 도착해 군용기에서 내리고 있다. 반정부 시위 진압에 실패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러시아 주도 군사동맹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에 평화유지군 긴급 파병을 요청했다.

[천지일보=이솜 기자] 카자흐스탄은 30년 전 소비에트 연방(소련)에서 탈퇴했을 당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핵무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며 석유 매장량이 방대한 국가였다. 이웃 국가들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번영하며 러시아나 서방과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던 카자흐스탄이 반정부 시위로 혼란을 겪으며 러시아에 도움을 청하자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카자흐스탄의 요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오는 10일부터 시작되는 서방과의 우크라이나 관련 중요한 협정을 앞두고 나타난 골칫거리인가 아니면 구소련 국가들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인가.

카자흐스탄 정부는 이 위기를 바른 방법으로 타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카자흐스탄의 대규모 시위는 다른 구소련 국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역대 최악의 시위’ 속 카자흐 정부, 러시아에 “SOS”

AP통신 등 외신들은 이번 카자흐스탄 반정부 시위를 두고 “30년 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최악의 시위”라고 평가했다.

카자흐스탄 당국의 엄중한 대응에도 6일까지 반정부 시위대가 거리에 쏟아졌다. 지난 2일부터 시작한 이번 시위는 액화석유가스(LPG) 가격 인상으로 촉발됐으나 실업과 인플레이션, 저임금, 부정부패 등으로 쌓였던 국민의 분노가 터진 셈이다.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카자흐스탄 정부는 LPG 가격의 상한선 폐지를 6개월 간 유예하기로 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기로 약속했으나 너무 적고 늦은 대응이었다. 대통령 관저와 정부 건물들이 불타고 시위대 수십명은 사살됐으며 경찰도 최소 13명이 숨졌다. 이 중 2명은 참수된 채 발견됐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시위대를 외국에서 훈련받은 테러 조직이라 규정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화와 인터넷 접속을 차단했다.

또 러시아 주도의 군사동맹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에 시위 진압 지원을 요청하면서 일명 ‘평화유지군’이 카자흐스탄에 상륙했다. 토카예프 대통령의 이 같은 요청은 다른 우려들을 자아냈다. 러시아가 평화유지군이 아닌 점령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에 파병된 CSTO 병력은 약 2500명이다. 이날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들 중에는 러시아 캅카스 지역 체첸에서의 1~2차 전쟁에서의 작전으로 악명이 높으며 최정예 특수부대 스페츠나츠로 불리는 제45 특수공수정찰연대가 포함돼 있다. 이 연대는 2008년 러시아 전쟁의 중심지인 조지아 남오세티야와 2014년 러시아가 합병한 크림 반도, 시리아에서도 활동했다.

당장에 미국 정부는 러시아군의 카자흐스탄 착륙을 견제했다. 6일(현지시간) 젠 사키 미국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은 이 요청(CSTO 평화유지군)의 성격과 정당한 초청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알마티=AP/뉴시스] 5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휴대전화 불을 켜고 시위하고 있다. 가스 가격 2배 인상을 규탄하는 시위대가 수도 알마티에서 경찰과 충돌했으며 다른 12개 도시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가스값 인상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폭력 시위로 확산하자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알마티=AP/뉴시스] 5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휴대전화 불을 켜고 시위하고 있다. 가스 가격 2배 인상을 규탄하는 시위대가 수도 알마티에서 경찰과 충돌했으며 다른 12개 도시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가스값 인상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폭력 시위로 확산하자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구소련 영향력 회복 기회” vs “우크라 협상 앞두고 골칫거리”

이 같은 우려는 푸틴 대통령의 가장 소중한 장기 목표 중 하나인 옛 소련 영토에 대한 영향력 회복과 닿아있다. 불과 2년 동안 러시아는 구소련 국가들인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우크라이나에 병력을 보냈다. 러시아의 지원은 무료로 제공되는 경우가 드물며, 특히 푸틴 대통령과 같은 전술가에게는 더욱 그렇다.

모스크바 국제관계연구소의 막심 수치코프 소장은 NYT에 “러시아 군대가 도착하면 그들은 거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카자흐스탄의 소요 사태가 “러시아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위기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군 파견이 푸틴 대통령의 목표에 실제 얼마나 기여할지는 불확실하다. 벨라루스에서는 확실히 이 전략이 성공했으나 우크라이나에서는 역효과를 낸 바 있다.

다만 이번 사태를 통해 카자흐스탄이 푸틴 대통령의 수중에 들어갔고, 푸틴 대통령 역시 그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이를 이용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앞서 카자흐스탄은 핵을 포기하고 셰브론이나 엑손모빌과 같은 미국의 거대 에너지기업들을 받아들이면서 미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으나 정권이 위기에 처하자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려던 노력이 뒤엎어졌다는 설명이다. 러시아에 도움을 호소하는 카자흐스탄 정부의 모습은 결국 서방이 계산을 잘못해 러시아에 큰 승리는 안겼다는 방증이라고 NYT는 분석했다.

막심 소장은 “카자흐스탄처럼 크고 강한 나라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는 광경은 충격으로 다가왔다”며 “이는 우크라이나를 제외하고 동서양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던 옛 소련 공화국들이 어떻게 위기를 맞고 러시아로 향하는지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반면 이 같은 단기적인 기회가 있더라도 러시아 현관 앞에서 벌어지는 혼란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별로 기뻐하지 않을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20년 넘게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공무원들에게 조언을 해 온 스콧 호튼 컬럼비아대 법학 강사는 “카자흐스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러시아에서도 분명히 일어날 수 있다”고 NYT에 말했다. 이날 CNN방송은 ‘카자흐스탄에서의 반란은 푸틴에게는 딜레마’라는 제목을 통해 크렘린궁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벼랑 끝 전술에 몰두하고 있으며 카자흐스탄의 사태는 잠재적으로 반갑지 않은 방해물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6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카자흐스탄 대사관 앞에서 카자흐스탄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다. 시위대가 카자흐스탄어로 ‘자유!’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걷고 있다. (출처: 뉴시스)
6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카자흐스탄 대사관 앞에서 카자흐스탄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다. 시위대가 카자흐스탄어로 ‘자유!’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걷고 있다. (출처: 뉴시스)

◆수년간 곪은 국민 분노 폭발… 정부는 정치화

이제 문제는 카자흐스탄이 이 혼란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지 여부다.

어렵사리 시위대를 진압한다고 해도 국민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근본적 원인인 인플레이션과 이 나라의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불만이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시민은 “매일 모든 식료품 등 제품의 가격이 상승한다”며 “더 비싸지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조치가 필요하다”고 CNN에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카자흐스탄 정부가 경제를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 지켜지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실업과 저임금에 대해서도 오랜 불만이 쌓였다. 특히 카자흐스탄 서부 중공업지역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한 불황과 불평등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만연한 부패와 수십억 달러를 해외 피난처에 숨기는 것으로 보이는 엘리트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경제적, 정치적 불만이 점점 더 합쳐지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국제앰네스티의 마리 스트러더스는 “이렇게 조용하게 분노가 고조되고 있는 곳은 없었다”며 “수년 동안 정부는 반대 세력을 가차 없이 박해해 국민을 동요와 절망으로 몰아넣었다”고 진단했다.

여기에 지난 며칠간의 사건들은 국제 투자자들에게 카자흐스탄이 사업을 하기에 안전한 곳이라는 명성을 훼손시켰다.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고 군대를 거리에 투입하는 것은 카자흐스탄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에너지와 광물 분야의 기업들을 불안하게 할 것이다.

지금 시위대의 리더십이 부족하고 시위대를 대표할 협상가가 뚜렷하지 않아 해결책을 내놓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지만 정부가 ‘경제 시위’의 본질을 정치적으로 변모시킨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라시아 그룹의 재커리 위틀린은 CNN에 “정부는 연료 가격을 낮추라는 당초의 요구에 양보했지만 이제 무려을 통한 통제를 재개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며 “이 시위는 더 이상 경제적이지 않고 노골적으로 정치화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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