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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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위원장: 김부겸 총리)는 4차산업혁명 글로벌 정책 컨퍼런스가 개최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화상 연설자로 초청된 대만의 오드리 탕 디지털 담당 정무위원에게 일방적으로 연설을 취소한다고 통보했다. 이러한 결례에 대해 대만 측은 당연히 강력히 항의했고, 반면 중국 관영매체는 ‘올바른 결정’이라고 추켜세웠다. 이어 21일 우리 외교부 대변인은 ‘대만 측 참석 문제는 제반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 4차산업혁명위와 외교부 간에 소통이나 협의가 전혀 없다가 외교부가 늦게나마 알게 되어 정부 차원에서 중국 입장을 고려해 행사가 몇 시간 후면 시작됨에도 대만 측에 취소를 통보한 것일 수 있다. 4차산업혁명위는 왜 외교부에 의견을 구하지 않았을까? 대만 문제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를 갖춘 직원이 없었거나 알고는 있었지만 화상회의에 초청하는 정도는 별문제 없지 않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또 하나 가능성은 외교부가 대만 인사 초청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압박을 가하자 초청 취소를 결정한 것이다. 외교부 대변인의 답변대로라면 문제의 대만 인사는 애초에 초청하지 말았어야 했다. 4차산업혁명위는 국제 행사를 추진하는 경우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외교부와 사전협의하는 것이 맞다. 4차산업혁명위가 끝까지 외교부에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면 위원회가 그런 수준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번 일은 대통령 직속위원회의 행사에 대만의 각료급 인사를 초청한 것이므로 정부로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초청을 취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중국 측이 행사에 임박해 항의했을 경우 중국 측에 행사 직전 취소는 곤란하다고 이해를 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4차산업혁명 글로벌 정책 컨퍼런스는 국제기구 및 주요국 전문가들이 4차산업혁명 정책과 혁신 사례를 소개하는 국제적 토론의 장이다. 즉, 참석자들이 정부 대표가 아니라 전문가 자격으로 초청받고 참석하는 행사이다. 이번 행사는 한국과 대만 사이 정부 차원의 접촉도 아니고 더구나 중국을 견제하는 성격도 아니다. 외교부는 이런 배경을 설명해 중국 측을 납득시키려고 해봤는지 모르겠다. 문재인 정부는 그간 중국에 대해 ‘새가슴’이라 할 정도의 모습을 보여 준 바 그러한 설명을 시도했을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번에도 한국이 과도한 ‘자기검열’을 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22일 “중국을 의식해서라기보다는 우리 외교 원칙을 따른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애초 하지 말았어야 할 초청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번 일로 해서 대만 측으로부터는 분노를 초래하고, 그리고 혹시 중국 측이 행사 몇 시간 전에 항의했음에도 우리 정부가 ‘신속’조치를 취한 것이라면 중국은 한국 정부를 속으로는 더욱 우습게 생각했을 것이고, 앞으로 한국은 중국-대만 관계와 관련해 운신의 폭이 더욱 줄어들 것이다. 또한, 이번 대만 정무위원의 화상 연설 초청이 과연 중국의 눈치를 볼 일인가에 대한 판단과는 별도로 국민들은 정부가 대외적인 일 처리를 꼼꼼하게 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대만과 관련해 또 다른 사례가 떠오른다. 2004년 7월 대만에서 천수이볜 총통의 취임식이 있었는데 한국의 몇몇 정치인들이 초대받아 다녀왔다. 당시 주한 중국 대사관에서 한국 인사들에게 전화해 협박 조로 불참을 종용했다. 이에 앞서 리빈 중국대사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서한을 보내 일부 소속의원들이 취임식 참석을 취소하도록 요청했다. 그런데 당시 무례한 전화를 받은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나라였다면 협박성 전화를 한 중국 외교관을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목해 추방했을 것이다.

끝으로 이번 일로 대만인들의 한국에 대한 아픈 기억이 다시 한번 되살아났을 것이다. 1992년 8월 21일 한국 외교장관은 주한 중화민국 대사를 불러 단교를 문서로써 공식 통보하고 3일 이내 국기와 현판을 내리고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대사관 건물과 부지도 중공 측에 넘겨주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물심양면 도와준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그렇게 야박스럽게 대우하는 것이 맞는가? 당시 상황을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보다 더 수교가 절실했다고 볼 수 있는데 중공의 요구에 휘둘리기보다는 중화민국의 서운한 감정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설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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