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부터 8월까지 100일간 꽃 피우는 무궁화… 8월 15일엔 만개

[천지일보=박수란 기자] 대한민국의 국화인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 민족과 반만년을 함께해 오면서 자연스레 우리 나라꽃이 됐다. 또 일제로부터 억압받았던 시절, 광복을 이뤘던 그 순간까지 우리 겨레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신기하게도 무궁화는 광복절인 8월 15일쯤 만개한다. 6월부터 8월까지 100일간 꽃을 피워 ‘영원
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란 뜻을 지니기도 했다.

◆광복절과 무궁화의 관계
무궁화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광복정신의 상징이 됐다. 이는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결의한 것을 시작으로 독립선언서의 문양으로도 사용하는 등 우리 정신을 그 속에 담았기 때문이다. 특히 남궁억 선생은 강원도 홍천군에 학교를 건립하고, 무궁화동산을 만들어 학생들과 무궁화를 키워 전국의 학교, 사회단체 등에 보내며 민족혼과 나라 사랑을 일깨웠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무궁화동산이 일제에 발각돼 7만 그루의 무궁화는 모두 불태워져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무궁화는 우리 민족과 함께 수모를 당하며, 나라를 빼앗고 우리의 정신까지 말살하려 했던 일제에 의해 뽑히고 불태워졌다.

김영만 무궁나라 대표는 “무궁화를 뽑은 자리에 자기네 꽃인 벚꽃을 심고 무궁화는 ‘만지면 부스럼 병이 생긴다’ ‘진딧물 같은 벌레가 많은 꽃’이라는 등 왜곡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줬다. 심지어는 학생들에게 ‘무궁화를 보면 침을 뱉어라’고 까지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의 생물이 민족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은 것은 우리 무궁화가 유일하다”면서 “이렇듯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해 온 꽃”이라고 설명했다. 명승희 대한무궁화중앙회 총재는 “무궁화는 일제에 의해 그 가치를 박탈당했지만 모진 고난을 이기고, 광복되면서 다시 대한민국의 상징이 됐다”고 전했다.

◆반만년 역사를 같이한 ‘무궁화’
무궁화는 고조선 건국 이전인 신시시대에 환나라의 꽃인 ‘환화(桓化)’로 불리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단 둘레에 많이 심겨 신성시됐다. 4300년 전 중국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무궁화가 많이 있어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우리 문헌인 조대기, 단군세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에도 명시됐다. 이뿐 아니라 삼국·통일신라·고려·조선 시대·일제강점기까지 무궁화와 우리 민족과는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문헌에 기록됐다.

신라와 고려는 나라 이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국에 보내는 국가 공문서에 ‘무궁화나라’이라고 스스로를 칭했다. 신라 시대 최치원이 작성한 효공왕 때 당나라의 광종에게 보낸 국서에는 ‘근화향(무궁화나라)’라고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우리 땅에 무궁화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삼국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화랑도는 무궁화를 머리에 꽂고 다녔다. 무궁화가 ‘귀함’을 나타내는 표시로 사용됐던 것이다.

김 대표는 “이렇게 소중한 무궁화가 일제강점 36년 동안 수난을 당하고 6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해왔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난 2006년부터 무궁화의 의미와 소중함을 되새기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 어린이가 쓴 ‘왜 무궁화의 날은 없나요’라는 짤막한 글을 통해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무궁나라 소속 무궁화 어린이 기자단이 중심이 돼 1만 명이 넘는 국민과 어린이들의 서명을 받아 2007년부터 8월 8일은 ‘무궁화의 날’이 됐다.

당시 서명을 받으러 다녔던 무궁화 기자단 정수민(17) 학생은 “우연히 들어가게 된 기자단에서 무궁화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배웠고 무궁화의 날이 지정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서명운동을 펼쳤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의 무궁화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집과 아파트 단지 내 마당에 무궁화를 심고 가꾸는 것은 물론 친구들에게도 나라꽃에 대해 알려주는 등 특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최근 들어 무궁화 관련 시민단체들이 무궁화동산을 만들고 축제를 여는 등 광복절에 맞춰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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