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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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이아이피(V.I.P. 2016)’의 박훈정 감독은 그럴 뜻이 없었다. 하지만 여혐 논란에 휘말렸다. 연쇄 살인범의 살인 장면을 너무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문제였다. 영화 속에서 문제의 장면을 보면 벌벌 두려움에 떠는 여성을 조롱하는 범죄자들의 모습이 매우 불편했고 여성 인권 유린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연쇄 살인범의 잔혹성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불편함을 관객들에게 줄 수 있었다. 잔혹한 사이코 패스의 악마성을 드러내려다가 여성의 몸을 도구화했을지 모른다. 아마도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있었다면 적절하게 조율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는 사실 최근에 생겨난 직업군이다. 출발은 미투 운동이었다. 2017년 10월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와인스타인의 스캔들이 터지면서 운동은 촉발됐다. 마리아 슈나이더는 1972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촬영 과정에서 감독의 성적인 접촉에 “모욕감”과 “강간을 당한 느낌”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물론 대본에 없던 내용이었고, 마리아 슈나이더 나이는 고작 19세였다. 에밀리아 클라크도 ‘왕좌의 게임’에서 노출신이 “끔찍했다”고 밝혔다. 여성임에도 제작진 앞에 벌거벗고 서 있어야 했다. 대형 스타가 아니고서는 현장의 이런 인권 침해는 제지되지 못하거나 항변할 수 없다. 권력의 불균등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는 배우 개인이 해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결국 제도적 조치가 일단 필요했다.

이에 따라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미국 배우 조합이 제안해 만들어낸 제도다. 성적 연기를 할 때는 촬영 현장에서 관련 전문가가 참여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이들은 훈련 받은 조력자들의 역할을 하는데, 포옹부터 키스 그리고 성행위나 노출에 이르기까지 배우들의 감정과 기분을 살피고 이를 최대한 반영한다. 미국 HBO는 이를 2018년부터 도입해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브리저튼’을 제작하는 현장에 적용했다.

김기덕 감독의 사례도 그렇지만, 2015년 영화 ‘사랑은 없다’ 촬영 현장에서 일어났던 반민정씨에 대한 성추행은 역시 범죄 행위를 감독할 수 있는 장치나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배우가 불쾌한 느낌을 받아도 그냥 넘어가거나 묵인해야 하는 상황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인권적 행태이다. 강조하는 것은 강간범의 리얼한 연기를 하기 위해 어떤 성적 학대도 합리화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영화 ‘브이아이피’가 리얼하게 여성 범죄를 보여준다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배우와 관객에게 고통과 불쾌감을 주는 것과 같다. 결국 이는 흥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여성 관객들이 움직이는 영화계이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필요한 장면은 최근에 또 있었다. 드라마 ‘마이 네임’의 한소희는 애초에 노출신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갑자기 대본이 수정됐다. 한소희는 남자 배우와 베드신이 등장해 놀랐다고 한다. 넷플릭스 자본으로 제작되는 영화였지만, 할리우드에서 활성화 되고 있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에 무심했다. 더구나 이 베드신은 사실 사족이라는 의견이 많다. 특히 젊은 여성들 시청자들이 이 장면에 대해 지나치다는 지적을 많이 하고 있다. 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설정은 충분히 창작의 자유이지만 노출과 표정을 꽤 오래 담아내는 것은 서사 흐름조차 방해한다. 물론 느와르 장르기 때문에 이러한 설정이 있어야 한다고 여길지 모른다. 여성 느와르라는 새로운 시도라면 인티머시 코디네이션이 필요했다.

한소희가 당황스러워할 때 이를 수용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이런 미흡한 점에 관객들은 부정적 평가의 입소문을 내는 모바일 환경이다. 물론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작품을 통제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오히려 영화가 작품성은 물론이고 나중에 불미스러운 논란에 휩싸이지 않게 사전 예방책으로 인식돼야 한다. 또 그렇게 운영이 돼야 한다. 모든 이들에게 상생할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비단 여자배우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배우이건 여자배우이건 두고두고 자신의 작품을 다시 보고 싶게 해야 한다. 고통을 떠올린다면 반(反)문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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