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회장/한국디지털융합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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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열풍이 불고 있다. ‘제2 벤처 붐’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벤처투자액은 종전 최대였던 2019년 4조 2777억원보다 268억원 늘어난 4조 3045조원에 달했다. 벤처펀드 결성실적 역시 전년보다 54.8% 늘어난 6조 5676억원으로 사상 처음 6조원을 돌파했다. 투자 건수와 투자를 받은 기업 수는 각각 4231건, 2130개사로 사상 처음 4000건, 2000개사를 넘어섰다.

이 같은 흐름은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올 1분기 벤처투자는 1조 2455억원, 펀드 결성은 1조 4561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모든 업종 투자가 늘어난 가운데 유통·서비스, 정보통신기술(ICT) 서비스, 생명·의료 등이 큰 폭의 증가세를 기록했다. 100억원 이상 투자를 유치한 기업도 역대 1분기 가운데 가장 많은 23개였다.

최근 벤처 열풍은 반도체, 자동차 등 기존 주력산업 공급망이 급속히 재편되는 가운데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벤처열풍의 와중에도 벤처업계는 날개를 펴지 못하고 있다. 벤처 생태계에 해결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 문제가 신사업 모델에 대한 정부의 낡은 규제다. 규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다 골든타임을 놓친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실감형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지만 증강현실(AR)·가상현실(VR), 원격의료 등의 규제가 혁신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AR·VR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문화체육관광부와 여러 산하기관에서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부처 간 정책이 중첩되거나 심지어 서로 부닥친다. 서비스를 위해서는 콘텐츠 등급 분류, 저작권과 안정성 검사, 전자파 적합성 평가 등을 부처별로 따로 받아야 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활성화된 원격의료와 데이터 공유관련 신산업 등은 각종 규제로 사업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많다. 원격의료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필요성이 증대했지만 현행 의료법상 의사와 의료인 간 의료 지식이나 기술 지원에 한해서만 허용되고, 의사와 환자 간 진단·처방 등 의료 행위는 여전히 금지돼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의료기기도 규제로 발이 묶였다. AI 기술 기반 의료기기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의료기기로 품목허가를 받더라도 이를 의료기기로 판매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에서 신의료기술 평가를 통과해야만 한다. 판매 허가 이중 규제다. 전자의무기록(EMR) 등 보건의료데이터를 플랫폼 사업자에 저장해서 의료기관에 데이터를 공유하는 서비스도 국내에서는 할 수 없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발전의 흐름에 기존의 규제체계가 기술혁신과 새로운 비즈니스의 적시 출현을 저해하고 있다. 규제 샌드박스 등 보완 시스템이 있지만 특례를 받은 기업조차 또 다른 규제로 말미암아 사업이 어렵다는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벤처기업협회가 지난 2019년 규제개혁 예산 책정, 규제개혁위원회를 공정거래위원회 수준의 실질적 규제개혁 부처로 승격, 각종 진흥법 폐기, 규제 총 영향평가 제도 도입 등 ‘규제개혁을 위한 10대 과제’를 제안했지만 지난 2년 넘게 진척된 바 없다.

벤처 열풍은 계속돼야 한다. 1990년대 말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우리나라가 먼저 극복과정에서 ‘제1 벤처 붐’이 큰 역할을 했다. ‘제2 벤처 붐’이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모델 창출, 혁신경제로 경제 패러다임 전환을 촉진해 일자리 창출과 경제의 질적 고도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벤처 붐이 거품으로 꺼지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시스템의 정비가 필요하다. 신산업에 대한 ‘규제 족쇄’를 과감히 풀어야 한다. 또한 창업자의 경영권 유지를 위한 복수의결권 제도를 서둘러 도입하는 한편, 이공계 인력 확보 등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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