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한국 세입자들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2~4년 사이에 이사를 강요받는 법률이 만들어져 있고 보증금은 불안 불안하고 주거급여는 범위도 좁고 액수도 적으며 주거수당 제도는 아예 없고 지옥고라고 불리는 지하옥탑고시원과 쪽방, 시설에 사는 사람들이 많고 선진국에 비해 낮게 정해진 기준마저 충족시키지 못하는 ‘최저주거기준 미달가구’가 100~150만 가구에 이르는 데다 주거안전이 허술한 주택도 많기 때문이다.

이사 첫날부터 세입자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문제가 바로 전세보증금 반환 문제다. 많은 경우 빚까지 포함된 보증금을 안전하게 회수하는 문제는 세입자들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하지만 국가는 너무나 소홀히 다루고 있다.

세입자 가구가 전세보증금을 떼이는 경우는 임대인의 경제사정이 악화돼 집이 경매로 넘어간 탓에 보증금을 일부 또는 전부 떼이는 경우, 임대인이 작심하고 사기를 쳐 보증금을 떼이는 경우, 집값이 하락함으로써 전세보증금을 떼이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세 가지 모두 세입자 가구에게는 청천벽력이다. ‘갭투기’와 연결된 전세 보증금 사기는 세입자들을 더욱 절망케 한다.

전세보증금은 세입자 가구의 주거권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다. 보증금이 없어진다는 건 거리로 나앉는 것을 뜻한다. 보증금 없이 얻을 수 있는 집이 있을까? 보증금 없이 살 수 있는 순수 월세는 아주 열악한 집 빼고는 거의 없다. 서울에도 오랫동안 재개발 지구로 묶여 있는 지역에는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10만원짜리가 있다. 이런 집은 쥐와 바람과 습기가 늘 가까이 있다. 방도 2~3평짜리 한 개가 있을 뿐이다. 1인 가구는 이렇게라도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3인 이상의 가구와 아이나 환자가 있는 가구는 살 수가 없다. 한국사회에서 보증금을 떼이게 되면 거리로 나앉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게 된다.

그제는 220명의 세입자 가구의 보증금 449억원을 떼어먹고 잠적했다는 뉴스가 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세입자 가구에게 물어준 돈이 400억원이 넘는다. 이 임대인이 소유한 주택은 490채에 이른다. 나머지 270개 가구 중 많은 가구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까봐 불안해하고 있고 아예 보증금 위기에 놓여있는지조차 모르는 가구도 많다. 신혼부부나 사회초년생이 피해를 봤다. 밀려오는 절망감을 어떻게 감당할까.

재작년 봄에는 서울 당산동 원룸에 사는 세입자 142명이 100억대의 전세보증금을 떼일 위기에 놓여 있다는 뉴스가 터졌다. 임대인과 공인중개사가 짜고 벌인 임대차 사기였다. 세입자의 보증금을 파악하지 않고 임대인이 제출한 계약서만을 근거로 거액을 대출해준 은행의 무책임한 행태도 한몫했다. 은행 직원까지 사기에 합류했는지는 입증되지 않았지만 의혹은 가시지 않고 있다. 임대인은 7천만원 내지 1억 5천만원짜리 전세를 내놓고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를 놨다는 내용의 가짜계약서를 무더기로 만들어 대출을 신청했다. 은행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승인했다. 사실을 파악하지 않고 대출을 남발해 세입자의 보증금을 위험에 빠지게 한 은행과 은행 관계자를 처벌해야 한다.

이게 나라냐 싶다. 이런 것 고치라고 촛불 들고 추운 날 광장에 모여 외친 것 아닌가? 문재인 정부는 민중들의 고통을 모르거나 둔감하기 이를 데 없는 정권임에 틀림없다. 국민들이 세금 내고 자식 군대 보내고 노동해서 나라살림 뒷받침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구체적인 대책을 내어 놓아라. 이게 정부의 책무다.

보증금 사기는 뉴스에 계속 나오고 있지만 뉴스에 나오는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전세보증보험 기관이 두 곳 있다. 이들 기관이 임대인 대신 물어준 보증금 액수가 2019년 한해만 2836억원이다. 올해는 8월까지만 해도 3015억원에 이른다. 보증보험에 가입한 세입자가 전체 세입자의 10%에 불과한 점을 생각할 때 매년 보증금을 못 받는 액수는 적어도 수천억, 많게는 조 단위에 이르지 않을까?

국가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 ‘갭투기 사기꾼들’이 판을 치고 있다. 정부와 국회는 언제까지 손 놓고 직무 유기할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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