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농장 창업주 김용복 회장

[천지일보=정현경 기자]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배추농사를 지었다면 믿겠는가?

 

▲ 김용복 회장(사진제공: 영동농장)
사막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인데 더군다나 배추농사라니 생소하기조차 하다. (서울) 영동농장 창업주 김용복(78) 회장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 때문에 배움의 꿈을 접고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중학교에 수석입학하는 등 어릴 때부터 총명한 모습을 보였지만 학비를 내지 못해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그는 부산 미군부대에서 구두를 닦고 심부름 등을 하는 하우스보이를 하면서 영어를 배웠다. 이후 부대장의 운전수를 하면서 결혼도 하고 건국대 야간대학에까지 다니게 된다.

베트남전 당시 미국 빈넬(Vinnell)社 노무자에 지원해 돈을 번 그는 귀국 후 잇단 사업실패를 하며 고난의 시절을 보냈다. 절망에 빠진 그를 도운 건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빈넬사의 보급행정관 일이었다. 그는 1974년 단돈 7달러를 손에 쥐고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각오로 사우디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중동에 파견된 한국인 건설근로자들의 건강과 근로의욕 증진을 위해서는 김치가 필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배추농사를 짓겠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배추농사는 무리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 회장은 김치용 채소재배에 도전한다. 한동안은 실패의 연속, 좌절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인부 8명과 함께 결국 채소재배에 성공, 1979년 배추 500㎏의 첫 수확을 얻게 됐다.

이후 김 회장의 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의 농장은 사우디의 명물이 됐다. ‘녹색혁명을 일군 기적의 사나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농장은 사우디 농과 학생들의 필수 견학코스가 됐다. 농장도 5개로 확장됐고 대규모 밀 경작까지 성공해 11만㎏의 밀을 사우디 농림부에 납품하자 일약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국내에서도 유명인사가 됐다.

1983년에는 9억 원을 들여 고향인 전남 강진의 간척지 232만여㎡(70여만 평)을 사들였다. 귀국해 새롭게 꿈을 펼칠 곳이었다. ‘만석지기가 돼 고향을 찾고 나처럼 돈 때문에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을 돕겠다’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장학사업도 펼쳤다. 1987년 강남구 신사동에 5층짜리 사옥을 짓고 1989년 사우디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리고 숙원이던 장학사업을 위해 20억 원으로 ‘용복장학회’를 설립했다. 황량했던 강진의 간척지를 거대한 농장으로 일궈 만석지기의 꿈도 이뤘고, 장학사업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14살에 떠난 고향을 70이 되어 돌아왔다는 그는 “참으로 멀고도 먼 길을 돌아서 왔다”면서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해서도 지금 못지않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성실히 알차게 살고 싶다. 또 다른 의미있는 일들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에 많은 힘을 쏟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그의 자서전 제목인 <끝없이 도전하고 아낌없이 나눠라>는 그의 모토이기도 하다. ‘농업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모은 재산의 사회 환원’이라는 인생철학을 가진 그는 2003년에 또다시 약 100억 원에 상당하는 사재를 털어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을 설립해 농업기술 향상에 지원하고 있다.

“어느 누군들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힘들고 아팠던 시절이 없을까마는 나의 과거는 수없는 좌절과 절망, 시련, 고난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고 회고하는 그는 “하지만 나는 주저앉지는 않았다.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며 꿈과 신앙으로 이겨냈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젊은이들에게 그가 가장 즐겨 암송하는 성경말씀을 소개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5~6)”

 

▲ 1978년 사우디 영동농장 앞에 선 김용복 회장(사진제공: 영동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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