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공산성의 배신, 백제 멸망 재촉 (3)
[다시 쓰는 백제사] 공산성의 배신, 백제 멸망 재촉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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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공산성 추정 왕궁지
공산성 추정 왕궁지

문주왕이 개척한 공산성

공주 웅천은 본래 마한(馬韓) 땅으로 백제는 ‘고마성’으로 불렀다. 고마는 곰(熊)에서 나온 것으로 ‘크다’는 뜻이다. 고마성은 후에 웅천성, 공산성으로 불려진다. 고구려가 한강을 장악하고 위례성에서 개로왕을 참수하자 아들 문주(文周)는 웅천으로 이도(移都)한다. 공산성은 북동으로 금강을 포용하며 자연적 해자를 이루고 있어 고구려와 신라군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는 적지였던 것이다.

문주왕 천도 이후 동성왕과 무령왕, 성왕 시기를 지나는 동안 공산성은 백제 부흥의 거점 왕도로 국운을 다시 열게 했다. 대륙의 남조 양(梁)나라와는 우호관계가 돈독하여 많은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왜(倭)와 유대를 깊이 하여 동맹을 강화하였다.

성왕(聖王)은 일본에 불교를 전수하였으며 남조의 많은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문화발전을 꾀했다. 이 시기 삼국 가운데 가장 멋진 궁성 건물을 설계하고 지은 것은 특기할만하다. 이 건축 기술은 고스란히 일본에 전수되어 아스카 문화의 기반을 이루었다. 공주 왕성 안에 대통사(大通寺)라는 대(大) 가람을 창건 경영한 것은 ‘大通’연호를 쓴 양(梁) 무제(武帝)와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는지 모른다.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厭髑滅身)조에 보면 “대통(大通) 원년 정미에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웅천주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통사라고 하였다(大通元年丁未爲 梁帝 創寺於熊川州名 大通寺云云)”라는 기록이 있다.

지금 그 절터는 바로 공주시 반죽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거대한 석조(石槽. 국립공주박물관 전시)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당시의 영화를 입증하고 있다. 대통사지에서 민간 건축을 하게 되면 엄청난 양의 와편이 발굴된다. 얼마 전 건축현장에서 ‘大通’글씨가 찍힌 와편이 발견되기도 했다.

<구당서> 기록을 보면 “백제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다.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월주(越州, 중국의 흑룡강성 지역)에 이른다. 남쪽은 바다를 건너서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 동서(東西)의 두 성이 있다”고 하였다.

동서 두 개의 성은 어디일까. 바로 부여, 공주로 본다. 그러나 일부학자들은 부여와 바다 건너 일본 고대 황실유적인 오사카 남부 가와치 아스카(河內近飛鳥)로 상정했다. 당시 일본은 백제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성왕, 무령왕 두 왕이 일본을 지배하다 귀국한 왕들이었다는 것이다(졸고 천지일보 역사칼럼 인용, 2015. 12.14).

공산성(公山城)은 백제 멸망까지 사비왕도의 부성(副城)으로서 기능을 다했다. 총 길이 2660m(석성 1925m, 토성 735m). 공산성은 토성구간과 석성구간으로 구분된다. 토성은 할석을 흙과 다져 판축한 고대 방식이며, 석성은 고려, 조선시대의 수축 방법을 보여 준다.

왕궁 건물 유적은 어디 있을까. 공산성 안 서쪽 산봉우리 정상 약 7000㎡ 규모의 반듯한 대지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공주 시가지와 금강 그리고 왕릉인 송산리고분군 등이 한 눈에 조망된다.

1985년의 발굴조사 때 백제시대의 많은 유구와 다량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왕궁 건물로 추정되는 건물지는 크기가 동서 35m, 남북 20m나 된다. 왕궁 내에서 필요한 용수조달 시설인 연못과 저장시설 등이다. 건물지에서는 백제 와당과 다양한 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 와당은 팔엽(八葉)의 연화문으로 공주 백제기에 유행했던 원숙한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태토는 곱고 유백색이며 부드럽고 아름답다.

대통사 당간지주
대통사 당간지주

글마루 취재반 공산성 답사

글마루 취재반은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 공산성을 답사했다. 세계문화유산등재로 한껏 정비기운이 부푼 공산성은 새롭게 단장된 느낌이다. 그러나 백제적 요소보다는 인위적인 단장으로 고색이 퇴색하는 인상을 떨칠 수 없다. 건물은 조선시대 감영 건물이고 석축도 조선식이다. 백제 왕성의 면모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보다 면밀한 학술적 연구와 사료로 공산성을 복원하는 사업이 돼야 할 것이다.

건물지와 성벽에는 여기저기 백제 편린이 산란하다. 유백색의 토기편과 와편이 널려져 있다.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유물들이다. 백제는 부드럽고 유약함으로 나라를 잃었다. 어느 시대이건 나약하면 침공을 받기 쉽고 나라가 망한다.

백제 멸망의 날 왕족들과 예식진의 배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강 기벌포에 상륙한 당나라 소정방이 피로감으로 사비성의 포위를 풀고, 공산성에서 의자왕과 예식진이 끝까지 사수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백제의 운명은 달라졌을 게다.

예산(임존성), 연기(두잉지), 청양(자비성. 주류성 추정) 등의 정예 원군이 합류, 포위한 후면을 공격했다면 나당연합군도 속수무책이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일국이 망하는 과정에는 이처럼 내부의 배신이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공산성 수조에서 찾아진 검은 금빛 ‘정관(貞觀)’명 옻칠 갑주는 의자왕의 갑옷으로 판단된다. 백제멸망의 아픈 사연이 어린 유물이자 역사의 경각이다.

공주 공산성에서 찾아진 와편들
공주 공산성에서 찾아진 와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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