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식민지역사박물관. ⓒ천지일보 2019.11.18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식민지역사박물관. ⓒ천지일보 2019.11.18

‘3.1운동 임정수립’ 100주년
12월까지만 무료 전시 관람

“36년간 식민지 흔적 곳곳에
남은 일제 잔재들 청산해야”

‘친일인명사전’ 43년 만에 편찬
4389명 친일행각 상세히 기록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다. 일제강점기에 억압받던 민중들이 저항했던 3.1운동, 그 후 중국 상해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임시정부 수립은 대한민국의 뿌리가 된 큰 밑거름이자 우리 민족사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에 종교계와 각 사회단체들은 이날을 기념한다며 학술대회, 세미나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준비해 분주하게 각종 행사를 치러냈다. 그러나 뜨거웠던 상반기 분위기에 비해 하반기에는 관심이 많이 사그라들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렇기에 올해가 가기 전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마음으로 일제강점기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운 좋게도 지난 9일은 박물관이 ‘기억을 둘러싼 투쟁-친일인명사전, 그 후 10년’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특별전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바로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인 임종국(1929년~1989년) 선생이 쓴 ‘친일문학론’ 중의 한 구절이었다.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도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 되며 진실만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이 어록은 박물관을 찾은 모든 사람의 발걸음을 ‘우뚝’ 멈추게 했다. 역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사학가인 단재(丹齋) 신재호 선생의 명언이 떠올랐다.

발걸음을 돌려 역사 속 영웅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니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 역사박물관’이라는 칭호답게 식민지역사박물관에는 1876년 조선 침략의 계기가 된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70년에 걸친 일제침탈과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 빛나는 항일투쟁의 역사가 기록돼 있었다. 또한 분단과 식민잔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청산운동의 과정이 담겨있었다.

4389명 기록 담겨 ‘친일인명사전’

“벌써 10년이 됐네요. 그럼에도 여전히 친일극우세력이 설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1층 특별전시관에 전시된 ‘친일인명사전’에 이 같은 내용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사전을 들여다보니 사전에는 1905년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 일본에 부역하고 민족에 반역한 4389명 인사들의 친일행각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이 사전을 제작한 편찬위원회의 설명에 따르면 친일파에 대한 정의는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를 말한다.

이에 사전에는 현존하는 징병·징용·위안부 문제와 전쟁동원에 협력한 자뿐만 아니라 인종 간 대결을 조장하거나, 신사참배를 선동한 이데올로그들의 죄적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일제의 통치에 협력한 인물들을 모아 놓은 친일인명사전은 故임종국 선생이 1966년 ‘친일문학론’을 세상에 공개한 후 만 43년 만에 편찬됐다.

시선을 옮기자 학교와 지역에 남아있는 모습들을 형상화한 다양한 일제 잔재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선도부와 교복문화, 애국조회 시간의 ‘국기에 대한 경례’, 체육시간의 국민체조와 체력장, 지명 등에 일제 잔재들이 남아있었다.

일본, 왜 조선 식민지로 삼았나?

2층에 들어서자 상설전시관은 일제 침략사와 독립운동사를 아우르는 자료로 가득했다. 전시는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동선에 따라 전시물을 살펴보면 ‘일제의 침략 전쟁,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한 시대의 다른 삶-친일과 항일’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등 4가지 주제로 나뉜다. 전시가 마치고 나면 일제 침탈의 역사와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 항일 투쟁의 역사, 36년 식민지의 흔적이 후세에 미친 영향까지 낱낱이 알 수 있게 된다.

전시의 시작은 당시 국제정세와 시대적 배경을 하나씩 짚어보면서 참극의 원인에 대해 설명한다. 19세기는 야만의 시대였다. 문명과 근대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약탈, 학살을 일삼으며 서로 더 많은 식민지를 갖기 위해 경쟁했다. 러일전쟁 당시 1904년 일본이 그린 지도를 살펴보면 한반도가 전쟁놀이터로 다뤄졌음을 알 수 있다. 한일강제병합을 성공시킨 일제는 특별한 주사위놀이판을 만들어 조선침탈과정을 기념하고 자축했다. 조선은 일제의 군사적 침략과 서구 열강의 틈새에서 시름하다 20세기에 들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고 새로운 지배자의 법을 따르는 자에게 신체와 재산의 보호를 보장했다. 그러나 일제에 맞선 의병전쟁은 1915년까지 계속 이어졌고, 20년간의 항쟁에서 의로운 민중 15만명 이상이 순국했다.

조선인에게 ‘신사참배’ 강요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의 일체화’를 통치 목표로 내걸고 조선인들을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협력시키기 위한 황국신민화정책을 밀어붙였다. 일제는 곳곳에 ‘신사’를 만들어 ‘천황’을 ‘신’으로 받들고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서사 암송을 강요했다. 또 한반도의 지하자원과 해양자원, 삼림까지 남김없이 약탈했다. 농촌에시는 쌀과 건초는 물론 군인과 군마가 먹을 식량과 가마니와 개가죽, 돼지가죽 같은 것도 군수물자로 샅샅이 훑어가 조선인들은 전쟁 기간 내내 굶주림에 시달렸다. 특히 우리 역사에 대한 교육과 연구도 하지 못하게 해 조선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하고자 했다.

전쟁터 ‘총알받이’ 된 조선 청년들

일제 침략전쟁이 길어지자 조선인 청장년이면 누구나 탄광·토목 노동자나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끌려가야만 했다. 일본,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최소 72만명 이상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는 차별적이고 폭압적인 대우를 받았다. 항상 감시 받았고 도주하다 잡히면 죽을 만큼 맞았다.

대부분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현장에 배치돼 일본인보다 사고율 사망률이 훨씬 높았다. 병력동원은 1938년부터 지원육군 해군·학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으나, 실상은 행정기관에 의한 강제동원이었다. 군인, 군속으로 동원된 40만명 이상의 청년들 가운데 2만 1000여명이 희생 당했다.

널리 알려졌듯이 수만 명의 여성들도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돼 강제노동과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외에도 3.1독립선언서 초판본, 동학 의병 관련 자료 등 희귀한 자료가 전시돼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낸 차리석 선생, 문화부장을 지낸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건국동맹의 채충식 선생,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 조문기 선생의 유품도 볼 수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400여점, 서고에 보관된 기록물까지 합하면 소장품이 7만점 가까이 된다고 한다.

일제 식민지 36년, 이처럼 당시 한국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로 인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은 일본에 과거청산의 국가적인 책임을 물었다.

그러다 2018년 10월 30일, 73년만의 판결이 났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가해기업들이 배상하라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판결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기업들이 배상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고 엉뚱하게 경제와 안보 분야로까지 문제를 확대시키고 있다.

이 시점에서 순국자들의 후손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음표를 던져본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기억과 성찰이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그 피해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거를 올바로 기억함으로서 우리가 역사의 산 증인이 돼야 한다. 일본의 경제보복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 일제강점기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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