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언제 돌아오려나, 안중근 의사(義士) 유해
[역사이야기] 언제 돌아오려나, 안중근 의사(義士)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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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서울시 효창공원의 3의사 묘역. 이곳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가 있다. 백범 김구는 1946년에 3의사 유해를 봉환해 효창공원에 묻었다. 이 때 김구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 봉환에 대비해 가묘를 만들고 표석을 세웠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

금년 3월에 세운 ‘의사 안중근묘비’에는 “(전략)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의해 교수형으로 순국하시고 중국 뤼순 감옥 인근에 매장되셨으나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해 빈 무덤으로 혼백을 모시고자 한다”고 적혀 있다.

1910년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마나베 재판장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기한은 5일간이었다. 2월 17일에 안중근은 히라이시 고등법원장과 만났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도록 한 달의 시간을 주면 항소를 포기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히라이시는 한 달 아니라 몇 달이라도 집필 시간을 주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이를 믿고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일설에는 어머니 조마리아가 두 동생을 급히 보내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고 당신의 뜻을 전한 것이 항소 포기의 주된 이유였다 한다.

사형을 앞둔 안중근은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3월 15일에 『안응칠역사』를 탈고하고 『동양평화론』 집필에 들어갔다. 그런데 일본은 사형집행일을 3월 26일로 앞당겼다.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안중근은 서문과 전감(前鑑)의 일부를 쓰고 펜을 놓았다.

3월 11일에 안중근은 경근과 공근 두 동생과 빌렘 신부를 면회한 자리에서 자신의 유해에 대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원래의 위치에서 고향으로 옮겨서 장례를 치름. 안중근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3월 26일 사형집행일. 안중근은 어머니가 보내준 흰 한복으로 갈아입고 사형장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마지막 유언을 묻는 집행관에게 안중근은 “나의 거사는 오직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바라건대 이 자리에 있는 일본인들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의 평화를 이루는데 힘쓰기를 기원할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동양평화 삼창’을 건의했지만 집행관은 거절했다.

10시 4분에 안중근은 교수대에 올랐고 10시 15분에 절명했다. 10시 20분에 시신은 교회당에 옮겨져 우덕순·조도선·유동하 등 거사했던 동지들이 영결했다. 이후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은 필사적으로 유해 인도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거절했다. 안의사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聖地)가 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오후 1시경 일본은 비밀리에 안중근의 시신을 뤼순 감옥 묘지 어느 곳에 매장했다.

안타깝게도 안중근 유해는 묻힌 장소조차 못 찾고 있다. 2008년에 남북 합의로 뤼순감옥 공공묘지 발굴 작업을 했지만 허사였고, 이후 중단 상태이다.

2018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을 남북 공동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냉랭하다.

109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 유해. 이 땅의 후손들은 너무나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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