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명소] 양한묵 선생 생가를 찾다…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옥에서 순국
[지역명소] 양한묵 선생 생가를 찾다…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옥에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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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해남=전대웅 기자]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마을에 세워진 순국비. ⓒ천지일보 2019.8.8
[천지일보 해남=전대웅 기자]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마을에 세워진 순국비. ⓒ천지일보 2019.8.8

선각자 환경에서 성장한 신동

불교·선교·신교 등 두루 섭렵

민족자강운동의 정신적 근간

3.1 태화관서 독립 만세 외쳐

 [천지일보 해남=전대웅 기자]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다.”

지강 양한묵 선생이 독립운동 중 체포돼 서대문감옥에서 일본 경찰에게 가혹한 취조를 받으며 한 말이다.

지강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이유가 백성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을 통해 항일정신을 심어줬다.

1919년 독립선언서에 서명과 함께 인사동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해 민족대표들과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유일하게 옥에서 순국한 인물이다.

◆선각자적 환경에서 자란 신동

양한묵 선생은 학포 양팽손의 12대 손으로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아버지 양상태와 어머니 낭주 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濟 州)양씨, 호는 지강(芝江)이다.

양한묵의 집안은 12대조인 양팽손 기묘사화에 연루돼 벼슬길이 막혔으나 할아버지는 영암의 양사재(養士齋, 고을 유생을 모아 교육하던 곳) 분관을 열어 인재교육에 힘썼다. 아버지는 전국에 콜레라가 유행할 때 많은 생명을 구했다. 어머니는 19세 때 노비 문서를 소각하고 노비를 풀어줬을 만큼 선각자적인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양한묵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천자문을 익혀 신동이라 불렸다. 8살에 영암 양사재(養士齋)에 들어가 유학을 배웠고 18살 이후에는 불교, 선교, 천주교, 신교, 음양 복술 등을 두루 섭렵했다.

19살에 풍산 홍씨와 결혼해 능주목(화순) 율치에서 학동들을 교육하며 생활하던 중 능주목사 조존두와 탁지부 대신 어윤중의 천거로 9품 주사에 임명돼 능주목의 세무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선생은 화순에 근무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체포돼 능주목으로 압송된 동학군을 목격하고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나 회의를 느끼고 3년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베이징 등지를 돌며 견문을 넓히고 이듬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국정과 세계 정서를 살폈다.

[천지일보 해남=전대웅 기자] 지강 양한묵 선생이 살았던 곳에 복원한 생가. ⓒ천지일보 2019.8.8
[천지일보 해남=전대웅 기자] 지강 양한묵 선생이 살았던 곳에 복원한 생가. ⓒ천지일보 2019.8.8

◆민족자강운동을 펼친 정신적 근간

양한묵 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한양으로 이주하던 1896년은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려고 다투고 있던 시기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조직돼 백성에게 자주, 자강, 민권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양한묵은 1897년 중국을 돌아보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조희연, 권동진 등과 교류하며 일본의 문물을 시찰했다.

이때 일본에 망명 온 동학 교주 손병희를 만난다. 지강은 동학의 평등사상과 개벽사상에 공감하고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으로 1904년 동학에 들어가 개화운동단체인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양한묵은 능주목의 세무관으로 있던 당시 이미 동학농민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김광수 문화해설사는 “능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인 장흥, 보성, 등지에서 활동하던 동학 농민군이 체포돼 능주목으로 압송됐을 때 참수를 당하게 될 무수한 동학 농민군을 구출했다”며 “이 일화는 훗날 양한묵이 동학을 천도교로 체계화시키고 이를 통해 민족자강운동을 펼친 정신적 근간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유일하게 옥중 순국한 양한묵

일본에서 동학에 입교한 양한묵은 제3대 교주인 손병희와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천도교의 근대화 운동에 기여했다. 1905년 말 손병희의 지시로 ‘천도교대헌’을 만드는 등 지강의 노력으로 1905년 12월 동학은 천도교로 바뀌었다.

기울어가는 대한제국의 국운을 되살리기 위해 천도교를 통한 구국운동과 청년교육에 전념해오던 양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이후 천도교라는 종교를 내세워 일제의 탄압을 피하면서 민족의식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항일운동을 펼쳐갔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돼 독립운동을 준비해오던 각계의 애국지사들은 천도교, 기독교 및 불교계 등이 힘을 합쳐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1919년 2월 21일 권동진과 오세창에게서 독립 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듣고 2월 27일 손병희, 이종일, 이종훈 등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해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독립선언식 직후 출동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그는 1919년 5월 26일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58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옥중 순국한 양한묵의 유해는 서울 수철리의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1922년 5월 향리인 전남 화순으로 옮겼다.

정부는 늦게나마 1962년에 양한묵의 공훈을 기리어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천지일보 해남=전대웅 기자] 양한묵 선생이 순국한 서대문형무소의 이미지를 본 따 디자인한 전시관 내부 모습. ⓒ천지일보 2019.8.8
[천지일보 해남=전대웅 기자] 양한묵 선생이 순국한 서대문형무소의 이미지를 본 따 디자인한 전시관 내부 모습. ⓒ천지일보 2019.8.8

◆서대문형무소를 본뜬 전시관

3.1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옥중 순국한 양한묵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독립운동 역사체험 마을 사업으로 생가와 함께 전시관을 열었다.

전시관의 외형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증인으로 영원히 남을 지강 선생이 옥사한 서대문형무소의 이미지를 따서 지었다.

김광수 문화해설사는 “양한묵 선생이 순국하고도 26년간 일제 강점기가 지속됐다”며 “최초로 옥중 순국한 만큼 그의 후손도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보고 뿔뿔이 흩어져 유일하게 도장 하나만 유품으로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전시관 뒤로는 복원한 생가가 있다. 건물은 오래전 없어졌지만, 영신 마을 어르신의 증언을 참고해 안채와 사랑채, 마을 중앙에는 양한묵 선생이 어릴 적 공부했던 서당 소심제도 복원했다.

또 지난 1991년에 영신마을 중앙에 세워졌던 지강 양한묵 순국비를 생가로 옮겨와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군은 양한묵 선생이 어린 시절 꿈을 키운 곳으로 알려진 비둘기 바위와 송림 등의 자연이 남아있어 앞으로 역사적 고증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활용할 예정이다. 33인 중 가장 먼저 순국해 그의 업적이 알려지지 않다가 올해 생가 복원과 전시관 개관을 했으니 많은 이들이 찾고 애국심을 다지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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