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정읍=김도은 기자] 전북 정읍 무성서원 입구. ⓒ천지일보 2019.8.12
[천지일보 정읍=김도은 기자] 전북 정읍 무성서원 입구. ⓒ천지일보 2019.8.12

전북 무성서원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위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라말 최치원 공적 기려 세워
매년 항일의병활동 기념행사

[천지일보 정읍=김도은·신정미 기자] 세계유산에 등재된 전북 유일의 서원인 무성서원은 어떤 모습일까. 세계유산위원회(WHC)가 지난달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결정한 ‘한국의 서원’ 중 하나인 무성서원. 무더운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지난 9일 백련의 향기 그윽한 태산선비문화사료관을 지나 무성서원을 찾았다. 무성서원이 자리 잡은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는 서남쪽에 솟은 칠보산에 기대어 형성된 마을이다.

서원은 공립학교 향교와 달리 지방 지식인이 설립한 사립학교다.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이 선배 유학자를 기리며 후학을 양성하고 지역사회에 성리학적 이념을 가르쳐 이상적인 지식인 양성을 목표로 한 조선시대 교육기관이다.

칠보면의 지명은 일곱가지 보물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 향약을 최초로 만들어 시행한 곳으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중국의 여씨향약을 본받아 만든 향약보다 8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는 손홍록과 안의 등 선비들이 전주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의 태조어진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겼다.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한 1905년에는 최익현, 임병찬 등을 비롯한 유생과 백성 800여명이 의병투쟁에 나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해 도화선의 역할을 했다.

◆신라 최치원 기린 생사당에서 시작된 무성서원

무성서원은 신라말 고운 최치원 선생이 태산태수로 부임해 8년 동안 선정을 베풀며 많은 공적을 남기고 떠나자 주민들이 생사당(생존해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고 한데서 유래됐다. 최치원이 부임할 당시 민초들은 호족들에 의해 땅이나 곡식을 수탈당하고 높은 소작료를 지불해 유리걸식하는 이들이 많았다. 최치원은 이때 엄정한 법 집행으로 관리와 호족들의 수탈을 막아 주민을 안심시켰다.

1544년(중종 39)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신잠 선생이 6년에 걸쳐 학문과 덕행을 베풀다 강원도 간성 군수로 전임됐다. 이에 주민들은 또 생사당을 세워 배향하다가 고운 선생의 태산사와 합했다.

1615년(광해군 7) 고을 유림이 서원을 세웠는데 1699년(숙종 22) ‘무성서원’이란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사액과 동시에 복호(부역이나 조세 면제) 3결이 지급되고 보노(잡역종사자) 30명이 지원됐으며 원생은 30명으로 정해졌다. 무성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전북도 내 유일의 서원이다.

[천지일보 정읍=김도은 기자] 무성서원에 탐방 온 정읍 애육원 시설 학생과 가족, 관계자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 2019.8.12
[천지일보 정읍=김도은 기자] 무성서원에 탐방 온 정읍 애육원 시설 학생과 가족, 관계자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 2019.8.12

◆현가루, 흥학과 예·악 정신 강조

무성서원 입구에는 외삼문 대신 1891년 건립된 전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팔작지붕 현가루가 들어서 있다.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에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층에 올라 루에서 밖을 바라보면 서원 서남쪽 밖으로 홍살문이 있고 주변에는 민가들과 그 건너에 푸른 들판이 한눈에 담긴다.

무성서원과 현가루 현판은 서원의 유래와 의미를 상징하는 의미 있는 현판이다. 태산이라는 옛 사우의 이름이 있었지만 흥학과 예·악 정신을 강조한 것으로 이 서원의 품격과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앞뒤 트인 강학 공간 강당

현가루를 지나면 1828년(순조 28) 중건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학 공간으로 사용된 강당이 있다. 좌우에 방이 배치돼 있다. 중앙 3칸의 마루는 벽을 없애고 기둥을 세워 앞뒤가 트여 아름다운 풍광과 자연을 벗 삼아 학문에 매진하도록 했다.

기둥에는 6개의 주련이 있고 천장에는 최치원 선생의 계원필경과 복호보노환복기(復戶保奴還復記-무성서원이 사액 됐다가 환수되고 다시 사액 되는 과정 기록) 등 30여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이전 현판이나 편액은 1825년 화재로 전소돼 현재 남아있는 편액들은 1828년 이후 작품들이다.

강학 시설은 강당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서재 강수재와 흥학재가 있다. 다른 서원과 다르게 동·서재가 담장 밖에 조성된 게 특징이다. 서재인 흥학재는 소실돼 현재 비석만 남아 있으며 서원과 관련된 다수의 기념비가 서원 안팎에 세워져 있다.

김명주 정읍시 무성서원 해설사는 “천년의 끊이지 않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며 “조용하고 포근하며 편안함을 모두 갖춘 고향의 품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천지일보 정읍=김도은 기자] 정읍 애육원 관계자들이 태산사 최치원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 2019.8.12
[천지일보 정읍=김도은 기자] 정읍 애육원 관계자들이 태산사 최치원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 2019.8.12

◆최치원과 6명의 영정·위패 봉안된 태산사

강당을 지나 자연석 계단을 오르면 사우(祠宇)인 단층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태산사가 있다. 서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향사를 지내는 곳으로 신라 말 태산현감을 지낸 최치원의 영정과 위패를 북쪽 벽에 배치했다.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문, 김관 등 위패가 좌우에 봉안돼 있다.

최치원 선생 영정은 유불선을 표현하고 있다. 유학을 상징하는 유건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스님들이 사용하는 불자, 발은 도교의 책상다리 형상을 해 풍류도와 화랑도를 연상시킨다. 사우는 1484년(성종 15) 창건하고 1844년(헌종 10) 중수됐다.

한편 매년 2월 무성서원에서만 만날 수 있는 ‘황토신도길’이 조성된다. 제향의례 전 서원 입구에서 마당을 거쳐 제향공간까지 황토로 길을 만들어 제사음식을 나르며 제관들만 통과할 수 있다. 이는 선현께 올리는 신로와 제물을 신성시해 모든 사사로운 기운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의미다. 강수제 앞에 보이는 기념비는 구한말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의병활동을 기념하는 비석으로 해마다 병오창의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전북도 이주철 문화유산과장은 무성서원의 세계유산등제에 대해 “전북 문화유산의 우수성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며 “전북문화의 자부심과 자존의식을 가지고 앞으로도 지역 문화유산이 세계 속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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