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공원 갤러리 60점 전시
“역사의 흔적 기억할 매개체”
일제 땐 창고… 이후엔 USO
“기억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
[천지일보=홍수영 기자] “매개체가 없으면 역사는 그냥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와 시대를 연결해주는 무언가가 없으면 역사는 그만큼 공허해집니다. 이 장소가 현 세대뿐 아니라 미래 주역들에게도 가치 있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난달 30일 용산 미군기지 내 건물을 활용한 갤러리가 개관식을 갖고 문을 열었다. ‘캠프킴’ 부지 내 옛 USO건물(616㎡ 규모)인 주한미군 미국위문협회(USO)에 ‘용산공원 갤러리’가 생긴 것이다. 114년 간 국민들에게 금단의 땅이었던 용산 기지 건물을 개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캠프킴 부지 내 옛 USO건물은 근현대 역사와 함께해 온 건물로 건축적·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약 110년 전인 1908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엔 일본군 창고 사무소로 쓰였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2018년 8월까진 USO로 운영됐다.
◆갤러리 방문한 시민들 “역사를 기억할 소중한 공간”
갤러리를 찾아온 정윤진(가명, 61, 남, 서울 양천구)씨는 근처를 지나다가 옛 USO 건물인 이곳을 지나다 40년 전 친구가 USO에 근무하던 일이 떠올라 들어오게 됐다고 소개했다.
정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 미군이 계속 주둔해 난개발 되지 않고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 우리가 꾸밀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보존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이런 천혜의 공간의 미래를 경제 논리만 쫓아 섣불리 결정해선 안 될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역사적 공간인 만큼 상처마저도 보존해야 한다. 매개체가 있어야 기억이 보존된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이곳을 방문한 대다수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지만, 간혹 젊은 시민도 찾아와 정씨의 말대로 미처 몰랐던 이 땅의 흔적들을 되짚어 봤다. 동국대 북한학과 석사과정을 밟는 중인 한 시민도 사진을 매개체 삼아 역사를 두 눈에 담았다.
장창봉(57, 남, 서울 성동구)씨도 정씨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는 “용산 미군기지가 없어지는 게 아쉬워 사진을 찍으러 나왔다. 담장 너머 건물들과 오래된 나무들 말이다”라며 “사진을 통해 변천과정을 볼 수 있으니 좋다. 이렇게 처음부터 역사가 쭉 정리돼 있으니 옛 기억이 떠오른다”며 1984년도쯤 미군과 함께 훈련했던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갤러리 근처의 남영동에 살고 있는 최아자(80, 여)씨는 갤러리 한편에 걸려 있던 한강 다리가 폭파된 사진을 보며 68년 전 그때로 되돌아갔다. 최씨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엔 서울에 있었지만, 이듬해 1.4후퇴 때 더는 버티지 못하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부터 6.25전쟁까지, 그 혼란한 시간을 다 겪어온 우리 세대가 참 고생 많이 했다”며 “둘러보며 추억해보니 이만큼 살 수 있는 게 감개무량하다”고 밝혔다.
◆한국 현대사 관통한 용산 기지… “시간 두고 역사 정리할 필요”
캠프킴 기지 내에 있던 USO 건물은 올해 8월 평택으로 이전했고, 해당 건물은 비어있었다. 서울시는 이 건물을 활용해 지난 8월 주한미군 측에 공동전시를 제안했고, 9월부터 주한미군 측과의 원만한 협의를 통해 30일부터 ‘용산공원 갤러리’ 개관식을 갖고 ‘서울시-주한미군 공동전시(Joint exhibition of SEOUL-USFK)’를 개최할 수 있었다.
갤러리 내 전시는 서울시와 주한미군이 공동으로 주관한다. 서울역사박물관, 국가기록원, 용산문화원, 개인 등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 지도, 영상 등 총 60여점이 전시된다. 73년간 한·미 동맹의 상징이었던 용산기지의 역할, 한국전쟁 후 지난 65년간 서울의 발전과 함께한 주한미군과의 관계와 공생 발전 과정을 담았다.
현재 용산 기지는 40%정도만 반환된 상태고, 완전 반환까진 2~3년이 걸릴 전망이다. 전시를 담당한 김홍렬 서울시 주무관은 이 틈을 활용해 해당 부지에 대한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섣불리 건물을 헐고 개발 계획을 세우는 대신, 시민들에게 빈 공간을 활용할 시간을 주고, 무엇을 기억할 지 선택을 하자는 입장이다.
김 주무관은 “이곳은 한미연합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 미8군사령부 등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사령부가 다 있었다”며 “이뿐만 아니라 미군에서 일한 수많은 한국 노동자들의 기억도 함께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4년 미군 하야리아부대 터에 개장한 부산시민공원(52만㎡)엔 아무런 메시지가 없다고 주장한 그는 “이 공간이 우리의 생각을 모으고 집대성하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며 “사람마다 지문이 다 다르듯이 각 땅의 문양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용산 미군기지는 용산 기지대로 기억해야할 것들이 어마어마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