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상트페테르부르크 2 -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역사이야기] 상트페테르부르크 2 -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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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네바 강 유람선 투어를 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해군본부를 지나니 건너편에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가 있다. 황금색 첨탑이 특이한데 이곳이 네바 강이 둘로 갈라져 핀란드 만과 합치는 지점인 토끼 섬이란다. 1703년 5월 16일에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의 공격에 대비해 이곳에 요새를 만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건설의 시초였다. 

1697년에 약관 15세의 카를 12세가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러시아와 폴란드, 덴마크는 스웨덴을 공략할 기회로 보고 1699년에 ‘북방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카를 12세는 그리 만만한 왕이 아니었다. 스웨덴은 즉시 덴마크를 공격했다. 수세에 몰린 덴마크는 물러났고, 1700년에 폴란드도 스웨덴에 패해 결국 동맹은 자동 해체됐다. 

1700년에 표트르 대제는 터키와 휴전 협정을 맺고 발트 해에 군사력을 집중했다. 1700년 9월 6일에 표트르 대제는 4만명의 러시아 군을 이끌고 스웨덴의 나르바(지금은 에스토니아의 도시) 요새를 공격했다.  2천명도 안 되는 스웨덴 군은 러시아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이윽고 카를 12세가 8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나르바 요새 구출에 나섰다. 스웨덴보다 몇 배인 러시아군은 스웨덴 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만명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카를 12세는 러시아 포로에게 먹일 식량이 부족하자 장교를 제외한 포로를 모두 풀어주었다.  

대패한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군의 전력 차이를 실감했다. 하지만 이는 쓴 약이었다. 그는 러시아 군대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기고만장한 카를 12세는 러시아는 안중에 없고 폴란드 점령에 나섰다. 이러자 표트르는 1702년에 라도가 호수 앞의 뇌테보리(지금의 실리셀부르크)를 점령했고, 1703년 봄에는 네바 강 하구 근처의 녠스칸스 요새도 점령했다. 표트르는 이곳에서 강을 따라 40㎞ 떨어진 곳에서 작은 섬을 발견했다. 이 섬은 대형 함선을 띄울 수 있는 요충지였다. 표트르는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기로 하고 5월 16일에 첫 삽을 떴다. 

그리고 6월 29일에 요새 안에 성당이 세워졌고 성 베드로와 성 바울 두 성인에게 봉헌됐다. 그리하여 요새 이름이 ‘상 피테르부르흐(성 베드로의 요새)’에서 ‘페트로파블롭스크(베드로와 바울의 요새)’로 개칭 됐다. 1704년에 표트르는 마침내 나르바 요새를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러시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접근하는 항로의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곳에 도시가 세워지리라.
 자연은 우리에게  
 이곳에 유럽을 향한 창을 뚫고  
 해안에 굳센 발로 서라는 운명을 주었도다.’
- 푸슈킨, ‘청동기사’(1833년) 

1704년 가을에 표트르는 해군본부 건설을 시작으로, 스웨덴과 최전방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그런데 네바 강 하구는 매우 척박한 습지였다. 파도가 높은 날이면 바닷물이 들이치고, 겨울이면 차가운 북풍을 정면으로 맞았다. 그러나 표트르는 강력한 통치력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도시 건설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외의 지역에서는 석조 건물의 건축을 금지시키고 모든 자원을 이곳에 퍼부었다. 계획도시 건설에는 스웨덴 포로들과 러시아 각지에서 강제로 동원된 농노 수십만명이 동원됐다. 이들은 힘든 공사를 하다가 쓰러졌고 무려 15만명이 죽었다. 어찌 보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인골(人骨)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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