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 유배 후 고향 온 정약용 “학문 논할 사람 어디 없나”
[문화공간] 유배 후 고향 온 정약용 “학문 논할 사람 어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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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박물관에 전시된 여유당 전서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실학박물관에 전시된 여유당 전서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정약용 열수에 돌아오다’ 展
실학박물관, 해배 후 삶 주목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책을 안고 돌아온 지 3년인데 함께 읽어줄 사람 하나 없네.”

18년간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 다산 정약용은 고향에 돌아와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학자로서 정약용은 고독했다. 모진 귀양살이를 견디며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안고 돌아왔지만, 함께 읽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산 정약용은 생전에 남긴 초상화가 없다. 사진은 1935년 그려진 그림(동아일보 연재 기사 속)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다산 정약용은 생전에
남긴 초상화가 없다.
사진은 1935년 동아일보 연재기사에 그려진 그림

◆유배 후 돌아온 마재

오랜 유배 후 자유의 몸이 된 정약용은 강진 다산을 떠나 1818년 음력 9월 14일 열수(한강가)에 있는 고향집 ‘여유당’으로 돌아왔다. 57세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온 정약용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남한강을 따라 선영이 있는 충주에 다녀온 것이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죽은 며느리 심씨의 묘지명을 지었다.

정약용은 그가 나고 자란 여유당에서 자신의 방대한 저술을 정리했다. 이 저술들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할 때 기초된 것으로 해배 후 여유당 본가에 돌아와 탈고된 것이었다. 또 정약용은 주자학에서 벗어난 자기만의 학설을 이야기했고 이를 누군가에게 검증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정성희 실학박물관 수석학예사는 “정약용은 벼슬길이 막혔지만, 자신의 글을 읽어줄 사람은 필요했다”라며 “자기만의 학설을 알리고 싶었지만 찾아오는 이가 없으니 ‘안 되겠다, 내가 직접 찾아야겠다’며 발걸음을 뗐다”고 말했다. 

◆신작과 학문 나누다

그가 처음 만난 사람은 석천 신작(1760~1828)이었다. 당시 신작은 여유당 건너편인 광주 사촌(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에 살았다. 그는 강화학파의 시조인 정제두의 외증손으로, 50살 때 부친이 마련한 세거지인 광주 사촌으로 이사해 경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1819년 음력 8월 초 정약용은 예학 관련 저술인 ‘상례사전’과 ‘매씨상서평’을 신작에게 보여주고 두 저술에 대한 비평을 부탁했다. 그 후 1828년 5월 24일, 신작이 6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깊은 만남을 주고받았다. 정 학예사는 “정치적으로 소론인 신작과 남인인 정약용은 당론당색이 다르고 학문적으로도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서로의 학문을 인정해주는 사이였다”고 설명했다.

정약용이 학문을 나눈 교유들이 살던 곳이 그려진 지도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정약용이 학문을 나눈 교유들이 살던 곳이 그려진 지도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30년 만에 재회한 문장가 ‘김매순’

한강 주변에 살던 학자들과의 교류는 신작이 어어 학문과 문장가로 손꼽히던 대산 김매순으로 이어졌다. 그는 정약용이 젊은 시절 규장각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이로, 30여년이 지나 백발의 노인이 돼서 재회했다.

김매순은 25세에 초계문신에 뽑혔으며 홍석주와 함께 여한십대가로 칭송되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30대 초 정치권과 멀어지면서 20년간을 양주 미음(현 남양주 와부 수석동)에 노모를 모시고 학문에만 정진했다. 정약용과 인간적인 만남뿐 아니라 학문에도 영향을 받아 이용후생이나 경세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정약용의 하피첩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정약용의 하피첩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홍석주 형제들과 교유

정약용은 연천 홍석주와도 교유했다. 홍석주는 역대 한국의 10대 문장가들의 글을 소개해 놓은 ‘여한십가문초’에 글이 실릴 정도로 문장력과 학식이 탁월한 인물이었다. 홍석주 집안은 19세기를 대표하는 경화사족(번화한 한양과 그 인근에 거주하는 사족)으로 다양한 서적을 수집하고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누구보다 빠르게 섭취한 가문이었다. 홍석주에게는 홍길주, 홍현주라는 걸출한 동생들이 있었는데, 정약용은 이들 3형제와 모두 가깝게 지냈다. 특히 홍석주의 동생이자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는 정약용이 사는 곳을 자주 찾아왔다.

정 학예사는 “1831년 10월 16일 홍현주가 마재로 찾아와 ‘수종사’ 가기를 원했는데, 70세인 정약용은 노쇠해 따라가지 못했다”며 “대신 차남 정학유와 초의선사가 같이 갔다. 이들이 함께 한 수종사 유람은 홍현주의 그림과 함께 ‘수종시유첩’에 잘 담겼다”라고 말했다.

1928년 여유당의 모습, 1925년 대홍수로 여유당은 떠내려 간다뒤 잠시 복구돼 강당으로 사용했다. 왼쪽에 다산사당의 모습도 보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실학박물관에 전시된 1928년 여유당의 모습 사진, 1925년 대홍수로 여유당은 떠내려 간다뒤 잠시 복구돼 강당으로 사용했다. 왼쪽에 다산사당의 모습도 보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북한강 거슬러 춘천에 가다

정약용은 북한강을 거슬러 춘천에 갔다. 평소 북한강을 유람하길 원했던 정약용은 1820년 큰 형 정약현이 둘째 아들 학순을 데리고 춘천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 동행했다. 이때 작은 배를 타고 갔는데, 정약용은 소양정에 올라 청평산 폭포를 보고 절구시 25수, 화두시 12수, 잡체시 10수를 지었다.

3년 뒤 북한강을 유람할 또 한 번의 기회는 찾아왔다. 장손인 정대림의 혼인할 손자며느리가 춘천 사람인 것이었다. 정약용은 이번에는 큰 배 두 척을 마련해 춘천에 다녀오는데 북한강 기행 글로 ‘천우기행권’과 ‘산행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정 학예사는 “한번은 조카의 혼사에, 한번은 손자의 혼례에 동행하면서 이뤄진 춘천 여행을 통해 정약용은 북한강 유역과 곡운 구곡을 돌아보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겼다”고 말했다. 이어 “또한 춘천지역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둔 장소에도 가보고 북한강 발원지에도 가보는 등 궁금했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뜻도 담겼다”며 “정약용은 눈으로 직접 보고 틀린 것을 바로잡는 실사구시의 학문정신을 지닌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경기도 남양주 실학박물관의 ‘정약용 열수에 돌아오다 展’에서는 정약용의 유배 후 삶에 대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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