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이야기(1)] 조선왕조 명암 드리운 궁궐
[궁 이야기(1)] 조선왕조 명암 드리운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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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궁의 정전인 숭전전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지난해 5대 궁궐을 찾은 내외국인은 652만 명이 넘을 만큼 궁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우리가 찾는 궁은 단순한 관광장소가 아닌 한 나라의 왕이 직접 나라를 통치했던 곳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고궁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수난과 고통을 견딘 5대 궁궐은 조선왕조사의 빛과 어두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동시에 다섯 궁궐 쓰인 적 없어

서울시에 존재하는 궁은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으로 총 5곳이다. 조선 건국과 함께 처음 지어진 궁궐은 경복궁이다. 이후 3대 임금인 태종이 창덕궁을 건립했으며, 9대 임금 성종은 주거공간을 보완하기 위해 창덕궁 옆에 창경궁을 건축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모두 소실되고 광해군 때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 새로 인경궁과 경덕궁(경희궁)이 창건됐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인경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경복궁은 고종 때에 재건됐다.

궁궐들이 번갈아 지어지고 없어지면서 다섯 궁궐은 동시에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늘 주요 궁인 법궁과 행랑채 역할을 했던 이궁으로 두 곳이 쓰였으나, 고정적으로 정해진 궁궐은 없었다.

구한말에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 불미스러운 사건을 거치면서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이어했다. 일제가 미술전시와 박람회 등을 궁에서 열면서 왕권의 위엄이 떨어졌다. 특히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명칭을 낮춰 불렸을 뿐만 아니라 동물원 과 같은 구경거리로 전락됐다.

광복 이후에도 궁궐들의 수난은 계속됐다. 경제발전만 좇다보니 웅장했던 궁궐들은 어느새 규모가 축소돼 있고, 소홀한 관리·감시로 훼손된 부분이 눈에 띄고 있다. 이제야 궁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은 옛 모양을 살리겠다며 재건에 나서고 있다.

◆왕과 가족들이 살던 ‘주거공간’

조선왕조 600년과 함께한 궁은 주로 나랏일을 맡아 보는 기관으로 주로 인식하지만, 왕이 가족과 함께 생활했던 곳이기도 하다. 근래에 한 매체에서 왕가 생활을 소재로 다뤄 궁에 대한 딱딱한 인식이 친근하게 바꾸었으나 아직까지도 왕가의 개인생활보다 역사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더 많다.

의친왕 손녀 이진 씨는 “세상에서 떠도는 궁 이야기는 거의 현대적이고 만화적인 이야기이거나 거의 닫혀 있는 딱딱한 이야기, 아프고 슬픈 역사 이야기가 대부분”이라며 “궁도 사람들이 살았던 장소였기 때문에 다양한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으면 한다”고 바랐다.

특히 창덕궁에서 26년간 거주한 황손 이해경 선생의 말을 빌리면 여느 가족들이 모이듯이 황실 가족은 댄스파티를 열고 친족끼리 모임을 돈독히 했다. 특히 이 선생은 궁 별관에서 텔레비전으로 만화를 봤던 생활과 무용수 최승희 씨의 ‘보살춤’ 공연을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전했다.

일제가 개입·간섭한 후 궁은 고유의 모습을 잃어버린 데다 현재에 와서는 한 나라의 문화의 고귀함과 의미가 담긴 건축물로 보존되기보다 기능적인 모습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는 옛날에 쓰던 건물 내지는 이름뿐인 역사와 국가 유산 정도로 여겨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이진 씨는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문화유산을 현재까지 열어놓고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국가는 많지 않다. 문화유산의 손실 위험이 크기 때문”이라며 “우리에게 생각의 고급화가 필요한 시점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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