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연군주의 백자 태항아리. 입구가 직립해 있는 이 항아리는 19세기에 만들어진 일반 항아리와 형태가 유사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태항아리, 풍수지리에 따른 길지(吉地)에 매장

[천지일보=박선혜 수습기자] 조선시대는 아기의 태(胎)가 즉, 현우성쇠(賢愚盛衰, 현명하고 어리석음, 성하고 쇠함)를 좌우한다고 믿을 만큼 신성시 여겨졌다.

특히 왕실에서 태를 처리하는 것은 아기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과 국가존속에도 밀접하게 관련돼 장태 절차를 국가에서 관리․시행했다.

왕실에서는 왕자와 왕녀가 태어나면 산실 내부에 위치한 길방에 안치한다. 이후 일정한 의식을 거쳐 태실을 조성해 태를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태실 위치를 선정했다는 것이다.

명나라 유생인 왕악은 책에 ‘만 3개월을 기다려 높고 고요한 곳을 가려서 태를 묻으면 수명이 길고 지혜가 있다 (중략) 일행과 왕악의 태를 간수하는 법에 의거해 길지를 가려서 잘 묻어 수(壽)와 복(福)을 기르게 하소서’라고 기록했다. 이 사료를 통해 태를 묻는 장소가 당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풍수지리설은 지형이나 방위가 사람의 길흉화복과 관계돼 죽은 사람을 묻거나 집을 짓는데 알맞은 장소를 선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태실 선정 시 풍수지리는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데 쓰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궁․능․원 등 전국의 많은 전통 조경 공간이 훼손됐다. 당시 일제는 태실을 파괴하고 강제 철거해 왕 태실 21위, 왕자 및 공주 태실 32위 등 모두 53위의 태실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겼다.

일제가 조선왕실의 많은 태실을 한 곳으로 모은 이유는 조선 왕실이 태실을 조성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학계에서는 말했다. 조선 왕실의 염원과 땅의 정기를 파괴해 식민통치를 삼으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왕실의 태를 신성시했던 조선시대에는 태를 보관한 기록들을 모아 의궤(儀軌)를 편찬했으며 의궤에서 왕실의 태 보관과 태실 주변에 배치했던 각종 석물 등을 배치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태실에 묻힌 태항아리 안에는 태의 주인공과 장태한 날짜가 쓰여진 태지석, 태실의 주변 경관과 지리적 형세를 그린 태봉도가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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