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명의 만력연간에 벌어진 격렬한 정치투쟁은 당파로 발전했다. 이부문선랑에서 파직된 고헌성(顧憲成)과 그의 동료들은 강소성 무석에 동림서원을 열고 재야활동을 시작하며 당대 인물을 선악으로 평가했다. 사대부들이 이들을 지지했다. 손비양(孫丕揚), 추원표(鄒元標), 조남성(趙南星) 등 유명한 정치평론가들이 참여했다. 그들을 ‘동림당’이라 불렀다. 여론을 좌우하는 그들의 담론을 ‘당의(黨議)’라고 불렀다. 동림당의 정적은 주로 선(宣), 곤(崑), 제(齊), 초(楚), 절(浙) 출신으로 5당이라고 불렀다. 역사는 동림당을 정파, 5당을 사파로 평가했다.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 하다’의 저자 레이황은 명을 멸망으로 몬 이 당파싸움은 만력제의 정치적 태업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동림당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진 당쟁이 명의 멸망 원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중국의 붕당은 사실상 일종의 종파(宗派)로 도덕적 표준을 제시했지만 결국 권력쟁취를 위한 인적결합에 불과했다. 정직과 사악을 판단하기는 쉽지 않았다. 동림당원은 대부분 실권을 잡지 못한 중하위직 관리나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대부였다. 그에 비해 5당은 실권세력이었으므로 확실히 우세했다. 동림당은 학식과 폭넓은 교류를 통해 시정을 비판하면서 지지를 넓혀갔다. 5당이 사회적인 명사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기는 위험했다. 특수한 상황을 창조할 수밖에 없었다. 우첨도어사 이삼재(李三才)는 만력제가 환관을 시켜 광업세를 거두자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높아졌다. 이삼재는 내친김에 5당까지 공격했다. 그러나 자신도 그리 깨끗하지는 않았다. 약점을 덮기 위해 고헌성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동림당원으로 몰리는 악수였다. 5당의 공격은 이삼재에게 집중됐다. 이삼재가 공격받으면 동림당이 지원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거양득이 가능했다. 이삼재가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황태자 책립문제로 정치적 태업에 들어간 만력제는 수수방관했다. 

결국 동림당의 수령 고헌성이 나섰다. 그는 대학사 섭향고와 손비양에게 편지를 보내 이삼재의 청렴하고 강직함을 주장했다. 평소에 이삼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어사 오량(吳亮)은 집안에서 대죄던 이삼재에게 편지를 보내 이러한 상황을 알렸다. 소문이 전국에 퍼지자, 5당은 다시 이삼재를 ‘십탐오간(十貪五奸)’으로 규정하며 집중 공격했다. 이삼재는 거의 희망을 잃어갔다. 15차례나 상소를 올려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했지만 끝내 사면에 관한 어떠한 답변도 없었다. 이삼재는 드디어 스스로 물러날 뜻을 비쳤다. 황제도 더 이상 그의 죄를 묻지 않았다. 해임명령이 하달되기까지는 무려 1년 3개월이 걸렸다. 이삼재는 고향인 통주 장가만으로 돌아가 쌍학서원(雙鶴書院)을 짓고 강학을 시작했다. 그러나 5당은 그가 조용히 은퇴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다. 몇 차례 인사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만 이삼재는 끝내 다시는 관직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상심한 그는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동림당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지만 5당과의 원한은 더욱 깊어졌다. 그들에게도 머지않아서 참담한 타격이 시작됐다. 조선의 당쟁도 서원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서원은 당쟁의 온상이었다. 당쟁 자체에 대한 다양한 측면의 평가가 가능하지만, 오죽했으면 집권한 대원군이 서원부터 철폐했을까?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