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지승연 기자] 2017년 12월 27일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 장면.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8
[천지일보=지승연 기자] 2017년 12월 27일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 장면.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8

동시대 러시아 극작가 이반 븨릐파예프의 연극

러시아 정치색 빼고 한 여자의 사랑에 집중해

주인공 심리 따라 무대연출 극적으로 바뀌어

[천지일보=이혜림·지승연 기자]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할 만큼, 추억은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데 도움을 준다. 한 남자를 향한 사랑과 추억으로 40년을 보낸 여자에 관한 연극 ‘발렌타인 데이’가 공연 중이다.

연극 ‘발렌타인 데이’는 한 남자 ‘발렌틴’과 그를 사랑한 두 여인 ‘발렌티나’ ‘까쨔’의 이야기다. 발렌틴과 발렌티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교제를 허락받지 못했다. 이후 발렌틴과 까쨔는 결혼한다. 15년 뒤 모스크바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난 발렌틴과 발렌티나는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고, 세 사람은 삼각관계 속에서 괴로워한다. 발렌틴은 4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술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던 까쨔는 전 재산을 발렌티나에게 팔아버린다. 발렌티나는 까쨔에게 함께 살 것을 제안하고 두 사람은 함께 60세를 맞이한다.

[천지일보=지승연 기자] 2017년 12월 27일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 장면.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8
[천지일보=지승연 기자] 2017년 12월 27일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 장면.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8

연극은 극작가 이반 븨르파예프(Ivan Vyrypaev, 1974~)의 2009년 작품으로, 독일에서 초연됐다. 이반 븨르파예프는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 등 수많은 대문호의 고향인 러시아 출신의 극작가다. 이번 연극은 동시대 러시아 작가의 작품을 보기 어려운 한국 연극계에 처음 소개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작품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는 러시아의 정치상황을 상징하는 장치들이 숨겨져 있다. 연극에서 배경으로 삼고 있는 년도는 러시아의 역사적 사실과 궤를 같이한다. 발렌틴은 1991년 거대한 소비에트 연방(소련) 해체를 이끌고, 대통령직을 사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yev, 1931~)를 상징한다. 극 중 발렌틴은 1991년~1992년 즈음 40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묘사된다. 일생을 발렌티나에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온 발렌틴과 까쨔는 소련 해체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로 대표된다.

[천지일보=지승연 기자] 2017년 12월 27일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 장면.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8
[천지일보=지승연 기자] 2017년 12월 27일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 장면.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8

작품은 은연중에 러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표현하지만, 이를 자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사랑’ ‘추억’이라는 키워드만으로도 충분히 연극을 즐길 수 있다. 번역 작업까지 겸한 김종원 연출은 “정치적인 부분을 빼고 사랑에만 집중했다”며 “현실에서 싸우고 갈등하고 끊임없이 전쟁하는 두 여자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한 사람을 사랑한 발렌티나와 까쨔는 상대를 미워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발렌틴을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잊지 못할 발렌틴의 흔적을 계속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서로를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서 애증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주인공의 심리는 무대장치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발렌티나의 회상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에는 쉴 새 없이 눈이 날리고, 낙엽이 쏟아지며, 편지가 떨어진다. 깨끗했던 무대는 발렌티나의 감정이 고조되고 복잡해질수록 여러 가지 소품으로 더러워진다. 그러다가 그가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모든 소품은 무대 중앙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러시아 공연예술상인 황금마스크상 시상에서 ‘최고의 시노그래퍼상’ 후보에 ‘이반들(2008)’ ‘이조또프(2009)’ ‘갈매기(2011)’ 등의 작품으로 이름을 올린 무대 디자이너 알렉산드르 쉬스킨(Aleksandr Shishkin)의 무대연출이 빛난다.

[천지일보=지승연 기자] 2017년 12월 27일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 장면.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8
[천지일보=지승연 기자] 2017년 12월 27일 연극 ‘발렌타인 데이’ 공연 장면.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8

예순의 나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극이 진행됨에 따라 열여덟살이 되기도 하고 스무살이 되기도 하며, 서른다섯·마흔이 되기도 한다. 원작에서는 각 나잇대별 배우들을 따로 캐스팅했으나, 한국 공연에서는 한 배우가 한 인물의 생애를 다 연기한다.

주인공 ‘발렌티나’ 역은 최근 SBS 예능프로그램 ‘싱글와이프’에 출연해 ‘우럭 여사’라는 애칭을 얻은 배우 정재은이 맡았다. 그는 예능에서의 맹하고 귀여운 모습과는 전혀 다른, 무대·스크린·브라운관을 오간 30년차 베테랑 배우의 면모를 보여준다. 작품 자체가 발렌티나의 시점에서 진행되기에 연극 전체의 큰 축을 끌고 가야 하는데, 그는 무대를 떠나지 않고 표정만으로도 기쁨·슬픔·절망 등을 표현한다.

‘까쨔’로 분한 배우 이봉련은 결혼생활 유지하고 싶어 남편의 불륜을 알고도 묵인하고, 버리지 않을 것 확인 받고 싶어 눈물 흘리는 모습을 통해 까쨔에 완벽 동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또 ‘발렌틴’으로 분한 이명행은 고르바초프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우유부단한 남자를 연기해 한국 버전 연극의 의도에 맞게 잘 표현했다.

연극 ‘발렌타인 데이’는 오는 14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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