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장건을 따라 온 오손국의 사자들은 한나라의 많은 인구와 왕성한 경제활동을 상세히 관찰하고 돌아가 그 사정을 왕에게 보고했다. 오손에서는 감화돼 한나라를 중시하게 됐다. 다시 일 년쯤 지나자 대하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사자로 갔던 장건의 부하들 모두가 원주민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렇게 하여 서북 여러 나라들과 한나라의 교통이 열리게 됐다. 이 교통로 개척에 공헌한 최초의 인물은 장건이었다. 장건의 명령으로 여러 국가로 간 사자들은 모두 장건의 이름을 들어서 상대국에 대한 신뢰를 증명했고 상대국 또한 한나라의 사절을 믿었던 것이다.

장건이 죽은 후 오손이 한나라와 교통하기 시작했음을 안 흉노족은 화를 내며 오손의 공격을 계획했다. 한나라에 왔던 오손의 사자 가운데는 오손을 발판으로 삼아 남쪽으로 진출하여 대원과 대월지까지 간 사람이 있었다. 그 뒤부터 이 길을 왕래하는 사람이 많았다.

흉노의 보복을 두려워한 오손은 사자를 보내 한나라에 말을 바쳤다. 그리고 한나라의 옹주를 부인으로 삼고 동맹국의 우의를 맺겠다고 청했다. 무제가 이 문제를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논하자 모두가 말했다. 먼저 약혼 예물을 받은 다음에 옹주를 보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무제가 주역으로 점을 치니 신마가 서북쪽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러는 중에 오손의 말을 받게 됐는데 그 말이 과연 좋은 말이었으므로 ‘천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나중에 피땀을 흘리는 대원의 말을 얻었고 그것이 한층 더 건장한 말이었으므로 오손의 말은 ‘서극’이라 고쳐 부르고 대원의 말이 ‘천마’가 됐다.

그렇게 하여 한나라는 영거 서쪽에다가 처음으로 성을 쌓고 주천군을 새로 설치해 서북 제국과의 교통 근거지로 삼았다. 이로써 안식, 엄채, 여헌, 조지, 신독국으로 계속해서 사자를 보내게 됐다. 더구나 무제가 대원의 말을 좋아해 더욱더 그 나라에 선발대와 후발대의 간격을 좁혀서 도중에서 서로 교체하기까지 됐다. 외국으로 가는 사자는 크게는 수백명, 작게는 백여명이며 그들이 가지고 가는 산물은 장건이 갈 때와 똑같았다. 그 뒤 행사가 관례화됨에 따라 사자들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한나라가 여러 나라에 일 년에 보내는 사자는 대략 10여 차례 적을 때에도 5~6차례였으며 먼 나라의 경우는 기간이 7~8년씩 걸렸고 가까운 경우도 수년씩 걸렸다.

장건이 외국과의 길을 개통한 공로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자 그를 따랐던 관리들은 서로 다투어 상소해 외국의 진귀한 산물이나 통상의 이익을 들먹이면서 사자로 갈 것을 자원했다. 무제는 그런 나라들이 먼 길이며 보통사람들이 가고자 원하는 곳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청원을 적극적으로 허락하고 그들에게 신임장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관리와 민간인 가운데서 지원자를 모집했다. 사절단을 모으기 위해서 사자의 자격 기준을 넓힌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원래의 책임을 완수하기는커녕 도중에서 답례품을 착복하는 자가 계속 나왔다.

무제는 그들이 외국사정에 정통하다는 점을 사서 그들이 한 일을 상세히 조사해 중죄에 처하고, 그 죄를 씻기 위하여 다시 사자를 지원하도록 했다. 사자가 해야 할 일은 점점 더 늘어났고 그에 따라 위법 행위를 하는 자도 늘어났다.

조정에서는 심사하여 정사와 부사를 임명했다.

그러나 사자가 된 자들은 대개가 가난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자로 가면서 조정에서 보낸 물품을 횡령하고 이것을 싸게 팔아서 제 주머니에 챙기는 것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상대국들은 사자들이 하는 말이 제각기 다르고 속임수를 쓰는 것 같아 싫어했다.

상대국들은 사자들에게 식량 공급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식량 공급이 중단되자 사자들은 궁한 나머지 서로 물어뜯는 일까지 발생했다.

기원전 87년 무제가 세상을 떠나고 소제가 황제로 즉위했다. 기원전 86년 사마천이 세상을 떠났다. 

*<사마천 사기>의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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