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대문일대 항공 사진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시대, 남대문으로 많은 물건 반입
도성민, 채소·과일 등 가져와 상품거래

일제강점기, 경성 시내서 가장 큰 시장
해방 후 시련 극복, 성장 드라마 연출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숭례문 앞 저자가 이른 새벽에 열리어 칠패(七牌, 난전시장) 사람들의 말소리 성 너머로 들려오네. 바구니 들고 나간 계집종이 조금 늦는 걸 보니 신선한 생선 한두 마리 구할 수 있겠구나.”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문집인 ‘여유당전서’ 내용이다. 이 글에는 조선시대 숭례문 앞 새벽시장과 칠패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장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

▲ 한양도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남대문시장 개장 역사적 의의

서울 중구에 위치한 남대문시장. 서울뿐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중심 시장이다. 조선시대에 남대문은 한강에서 도성에 이르는 최단거리에 위치한 성문이었다. 그래서 가장 많은 물자가 이곳으로 반입됐다.

조선 세조 대에 남대문 안쪽에 ‘상평창’이 설치됐다. 이곳은 물가 조절과 기근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었다. 상평창의 업무는 풍년에 곡가가 떨어지면 시가보다 비싼 값으로 사들여 저축했다가 흉년이 들어 곡가가 오르면 시가보다 싼값으로 내다 팔아 가격을 조절함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곳이었다.

조선 후기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관곡을 빌려주었다가 돌려받는 제도는 효용을 잃었다. 1608년(선조 41, 광해군 즉위년) 조선 정부는 대동법을 시범적으로 시행하면서 상평창을 폐지했다. 따로 ‘선혜청’을 설치하기도 했다. 대동법은 농민이 현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 베, 돈 등으로 대납하도록 한 건데, 이를 선혜청에서 총괄했다.

상평창이 선혜청이 된 뒤 이 주변에서 간헐적으로 열리던 상품거래는 더욱 활발해졌다. 선혜청 창고 앞에서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도성 근교의 농민도 채소나 과일, 생선, 육류 등도성민의 생활필수품을 이곳으로 가져왔다.

이런 변화를 발판으로 선혜청 앞 조시(朝市)는 준상설시장으로 발달했다. 이것이 남대문시장의 시작이었다.

▲ 남대문시장 양은그릇가게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제 강점기 남대문 시장

일제강점기에는 남대문시장이 사라질 뻔했었다. 당시 남대문 시장은 경성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조선인 시장’이었다. 상품을 판매하는 상인과 상품을 구매하는 고객은 대부분이 조선인이었기 때문.

경성부 대표 시장이 조선인 시장이라는 것은 일본인 눈에 그리 달갑지 않은 풍경이었다. 이에 상품 거래의 근대화라는 핑계로 남대문시장 중심 상업거래를 해체하고 조선총독부의 관리하에 있는 공설 시장으로 그 중심을 옮기고자 했다. 이에 맞서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시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일본인 유력자들과 송병준을 비롯한 친일파들도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기에 남대문시장 운영권을 장악했다. 그 결과 공설시장을 만들고자 하는 일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남대문시장은 일제강점기 내에 경성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장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선혜청 창내장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국 전쟁 이후, 그리고 오늘날

1945년 해방을 맞이했지만, 대한민국은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 시장개방과 외환위기 등의 소용돌이에도 휩싸였다. 이런 격변기에 서울은 역사적 변화의 중심무대가 됐고, 남대문 시장도 대내외 정세 변화에 조응하면서 시련을 극복하고 변화와 성장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1960~1970년대에는 인구폭증과 경제성장에 힘입어 시장이 급성장했다. 이 시기 남대문시장은 수차례 화재와 재건축을 거치며 시련을 겪었으나, 비약적 성장과 공간 확장을 이뤘다.

1980년대에는 전국 최고의 의류시장으로 성장했다. ‘남싸롱’ ‘남문패션’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통해 남대문시장은 세계로 알려지게 됐다.

현재도 이곳은 우리나라의 얼굴이 되는 시장이며, 서울의 관광명소로 외국인이 들르는 곳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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