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대 권상일 초상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 숙종 대 인물 청대(淸臺) 권상일 일기 
아내 편지 두루마리로 만들어 눈물로 회상
부친에 대한 존경과 가족에 대한 애정 담아
당시 정치 경제 사회상 연구에 중요한 사료 

[천지일보=이재준 칼럼니스트‧역사연구가, 정리=송태복 기자] -모월 모일...죽은 아내의 편지를 수습하여 한 축을 만들어서 때때로 생각날 때 펼쳐 보는데, 마치 마주 대하는듯하여 비통한 가운데도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 뒤로 어찌 다시 이와 같은 편지를 얻을 수 있겠는가. 생각 할수록 목이 멘다...-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은 조선 숙종‧영조 연간에 활동한 영남 퇴계학파의 대표적 문신이다. 일찍이 아내 김씨와 사별했는데 그녀의 편지를 두루마리로 만들어 자주 펴 보며 그리워한 것을 일기로 적었다. 평생 아내의 글씨를 가슴에 안고 살았으니 아내사랑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겠다.   

벼슬길에 나서면서 청대는 아내를 고향 상주에 두고 시부모를 모시게 했다. 그것이 사반가의 풍속이며 법도였다. 먼 곳에서 두 내외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모양이다. 항상 신혼의 그리움이 가득했는데 아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청도는 슬픔과 회한으로 가슴을 쳤다. 청대는 아내를 잃은 후에도 장모나 처남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청대는 효심이 투철했으며 가족 사랑이 지극했다. 그가 쓴 일기 가운데는 가족, 친지들의 안부와 상사(喪事)에 대한 위문편지 등이 많이 기록되었다. 특히 부친과 가족들에 대한 예의와 존경, 각별한 배려를 담고 있기도 하다. 40세에 쓴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 

▲ 청대일기는 숙종-영조 연간에 활동한 영남 퇴계학파의 거목인 청대 권상일(1679-1759)의 일기이다. 문경근암서원에 소장된 청대일기 본문. ⓒ천지일보(뉴스천지)

-기해(己亥.1719년 숙종 45) 2월 20일  종을 공검지에 보내어 못의 물고기를 사 와서 피접장소를 들여보내도록 하였다. 가친의 병세가 갈수록 좋아진다고 하니 기쁘고 다행스럽다. 함창 종숙모가 어제 돌아가셨다고 한다. 매우 애통하다.-

 
청대는 나이 31세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됐다. 당시 승문원 신참에 대해서는 혹독한 신고식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면신례(免新禮)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신입식을 치르고 나서 심경을 일기에 기록했다. 

 -신묘(辛卯. 1711년) 4월에 한양에 도착한 후 ‘괴원고례(槐院古例.승문원의 전통)’에 의하여 면신례를 거쳤다. 면신례는 혹독했으며 밤에 귀복(鬼服)차림으로 선배들의 집을 돌면서 자신의 명함을 돌리는 회자(回刺)와 허참(許參)의 과정이 있었다..- 

그는 노론의 영수 우암(尤庵) 송시열이 타계한 후 제자들에 의해 청천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가 지어지고 제향이 이루어진 것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도 대명의리를 존중했던 노론과 이를 반대했던 남인들의 엇갈린 여론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갑신(甲申.1704년. 숙종 30).. 2월21일 송시열은 일찍이 사신이 북경에 갔을 때 신종 황제가 쓴 글을 구하여 돌아왔는데 그것을 화양동의 바위에다 새겼다. 그의 제자들이 비로소 지금 집을 지어서 글을 새긴 돌을 덮고 지난 달 하정일에 지방을 써서 신종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음악은 천자의 예악으로 행했다. 이 일은 모두 권상하가 한 것으로 곳곳에서 여론이 분분하다고 한다..-

이 대목은 조선유학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당시 우암의 제자 권상하가 스승의 유명에 따라 명나라 마지막 황제 신종의 글씨를 암반에 각자하고 만동묘를 세웠을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또 청 황실 공물요목에 표범가죽이 있었으며 이를 쌀로 환산 감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표범 가죽은 무려 140장이나 되었다. 조공물자를 조달하느라 조선 조정이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임진(壬辰.1712년. 숙종 38) 1월 6일 .. 좌랑 황미숙(黃美叔)의 답장 편지를 받았다. 북경에서 지난 겨울 공물 표범 가죽 140장과 천은(天銀) 1천 양을 차감해 주었다고 한다. 아주 괴이쩍다. 표범가죽 한 장은 쌀 40섬이라고 하니 차감 해 준 것이 또한 많다...-

이해 2월 청대는 일단의 통신사 무리들이 일본을 다녀오면서 만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일본국의 오만을 전하자 굴욕에 치를 떨었다. 

-2월 29일.. 통신사가 어제 우리 읍을 지나면서 일본 문물이 아주 잘 갖추어 졌다고 전하며 “너희 나라가 퇴계를 정주와 다름없이 여기며 칭송하기를 입이 마를 지경이구나.” 라고 했다 하고, 또한 “문명의 운명은 지금 우리나라에 달려있다.” 라고 과시 했다고 한다. 듣고 나니 아주 가소롭다. 그러나 저들은 멀리 떨어져서 풍속이 다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을 수 있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평소에 예의의 나라라고 칭하면서 부끄럽지 아니한가...(중략)... 이것을 생각할 때면 항상 나도 모르게 거의 눈물이 흘러내려 그칠 수 없는 지경이다-

이 일기에는 조선 선비의 예의 정신과 사상, 인간적인 면모가 리얼하게 투영돼 있다. 그가 남긴 일기는 57년간의 기록으로, 조선 중기 정치 경제 사회상을 연구하는 일사(日史)로서도 가치를 지닌다. 

일기 속에는 그의 문학 작품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한시 164수와 13편의 산문이 수록 되어 있다. 남인으로서 영남의 승경을 예찬했거나, 특유의 애향의식인 신라 왕조에 대한 존숭을 담아내기도 했다. 청대의 시나 산문을 통한 학계의 연구 사례는 적지 않다. 

개인의 일기는 일사(日史)로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정사의 공백을 복원하는 귀중한 사료로서 활용되고 있다. 청대 권상일의 일기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 공동체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것으로 반추해 볼만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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