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 ㈔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상임고문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 겸 전승축하기념식이 열린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지금은 이름이 변경되어 루쉰공원 이라고 한다)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25살의 청년 윤봉길이 던진 폭탄으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가 폭사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5월 25일 상하이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11월 18일 일본으로 압송돼 가나자와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어린 시절부터 민족정신이 뛰어났던 윤 의사는 재향시절 야학당을 개설(1926년) 문맹퇴치운동, 독서방을 설치(1927년) 독서운동, 부흥원을 설립(1928년) 농민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펼쳤는가 하면, 1929년 4월 민족구원단체 월진회를 조직해 독립정신을 고취했었다. 1930년에는 “장부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그해 3월 6일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도중 평북 선천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돼 달포 간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탈출, 그곳에서 김태식·한일진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청도를 거처 1931년 5월 8일 목적지 상해에 도착했다.

윤 의사가 상해에 도착해 임시정부와 주변상황을 살피던 무렵, 일제는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하고 괴뢰국가 ‘만주국’을 수립하려는 공작을 펼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공작의 일환으로 일제는 1932년 1월 18일 자신들이 음모해 죽인 일본승려살상사건을 트집 잡아 같은 해 1월 28일 상해사변을 도발했다. 설상가상으로 시라카와 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은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중국의 상황은 참혹해 눈뜨고 볼 수 없는 비극 그 자체였다.

중국이 상해사변에 패한 바로 뒷날 일어난 윤 의사의 의거는 중국인들의 응어리진 한을 대신 풀어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반응은 아주 열렬했고 윤 의사에 대한 흠모와 존경심은 매우 컸다. 특히 중국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낸 이 장거는 중국 총통 장제스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켜 그가 카이로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원인이 됐다. 장제스는 제2차 세계대전 말 전후처리문제를 사전협의하기 위해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고,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던 처칠과 루스벨트를 끝까지 설득함으로써 전후 조선의 독립을 약속 받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식민지 국가 중 유일하게 우리 조선만이 전후 즉시 독립할 수 있었다. 이처럼 윤 의사 의거는 나라를 다시 찾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사실 윤 의사의 의거는 비단 조선뿐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6년 1월 29일 중국공산당이 파리에서 발행하던 ‘구국시보(救國時報)’는 윤 의사를 ‘상해보위전의 순국열사’ 명단에 수록했다. 이는 중국 인민이 윤 의사를 자신들의 민족영웅으로 숭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해 3월 5일자에서 이 신문은 ‘윤봉길 열사는 비록 숨을 거두었지만 우리 혁명에 대한 열사의 업적은 영원하리라! 열사는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했지만 열사의 정신은 우리당 동지들을 격려해 주었으며 용맹하게 전진하라는 메시지였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또한 1989년 10월 상해시위당사자료정집위원회(上海市委黨史資料征集委員會)에서 발행한 ‘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는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 의사만 혁명가로 올라왔다. 사진과 약력이 한 페이지 전부에 수록될 만큼 윤 의사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평가가 상당히 높다.

윤봉길 의사 동생 등 8명은 상하이시 외사판공실 양신화 부처장의 협조 아래 1990년 4월 29일 아무 흔적이 남아 있지 않는 루쉰공원 내 의거현장에서 첫 의거기념식을 거행했고, 이 일이 계기가 돼 1994년 4월 중국 정부는 부지와 건립비용을 들여 의거현장에 윤봉길의사기념관 ‘매정(2009년 3월 매헌으로 개명)’을 건립했다. 이후 그곳 매헌 앞 작은 광장에서 매년 의거 일에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와 중국 홍커우구 인민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한중공동기념식을 거행해오고 있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정작 대한민국 정부는 윤 의사 기념과 관련 그 사업이 뜨뜻미지근하다. 우리 정부도 윤 의사의 의거현장에서 거행되는 한중공동기념식에 관심을 갖고 이 기념사업을 확대하는 등의 활동으로 한중관계 개선에 힘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최근 사드배치 문제로 굳어진 한중 양국의 관계가 윤 의사 기념사업으로 개선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대통령과 정부 고위급 인사가 상해를 방문할 시, 임시정부청사만을 방문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윤 의사의 의거현장도 찾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끓는 청춘을 바친 윤 의사를 기렸으면 한다. 이는 단지 윤 의사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그토록 바라던 모든 독립투사들의 넋을 기리는 것이요, 그분들의 희생으로 얻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감사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중국에서도 높게 평가하는 윤 의사의 역사적인 업적을, 양국 정상과 고위급 인사들이 함께 되새긴다면 굳었던 양국의 마음이 한결 따뜻하게 풀리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한중 관계 개선을 필요로 한다면 윤봉길 의사를 매개체로 활용하는 방안도 고려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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