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산동성 연태시에 속하는 봉래는 원래 등주(登州)라고 불렀다. 항구의 북쪽 15㎞ 지점에 있는 묘도군도(廟島群島)에서 요동반도의 노철산(老鐵山)이 보인다. 묘도가 요동과 산동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면서 약 6천년 전부터 한반도로 통하는 항로가 형성됐다. 등주는 대륙과 동방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의 기점이었던 셈이다. 이 항로를 따라 북쪽으로 요동반도를 통해 만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한반도로 이어졌으며, 남쪽으로는 일본으로 이어졌다. 방사 서불(徐巿)은 이곳을 출발하여 한반도와 제주도를 거쳐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한무제 원봉2년인 AD 109년, 누선(樓船)장군 양복(楊僕)이 이곳을 출발해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군항으로 변했다. 위(魏)의 경초(景初) 2년인 AD 288년, 사마의(司馬懿)는 요동을 정벌하면서 이곳에서 대형선박을 건조했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일본의 사신이 이곳을 거쳐 낙양으로 갔다. 남조시대 60년 동안 일본은 8차례 견당사를 건강으로 파견했는데 등주에 도착하여 산동반도를 따라 남하했다.

수당시대에는 10차례 고구려, 백제, 신라와 전쟁이 벌어졌다. 등주에 집결한 군대는 묘도를 거쳐 요동에 이르거나 충남 태안반도 부근에 상륙했다. 그때마다 이곳은 전쟁물자의 집결지였다. 봉래는 또 한반도와 일본에서 파견된 사신과 승려, 유학생들이 집결하는 번화한 항구였다. 일본에서 한반도를 거쳐 중국으로 오는 상선은 이곳에 기항했다가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초주(楚州), 양주(揚州), 명주(明州) 등지로 흩어졌다. 일본의 승려 원인(圓仁)은 AD 838년 제18차 견당사를 따라서 봉래에 왔다가 오랫동안 중국에 거주했던 기록을 남겼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그는 등주 개원사(開元寺)의 벽에 많은 일본인들이 이름을 새겨놓았다고 했다. 일본인들처럼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도 역시 등주를 거쳐 장안으로 갔거나 수많은 승려들이 인도의 북부지방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을 것이다. 7세기 중엽 봉래에는 신라 상인의 집단거주지 ‘신라방(新羅坊)’, 영사관인 ‘신라소(新羅所)’, 무역협회인 ‘구당신라소(構當新羅所)’가 있었다. 그만큼 등주는 한민족의 중국진출사와 밀접한 곳이다.

북송 초기에도 등주는 고려와 일본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에서 중국으로 파견된 사신들은 대부분 일단 이곳 등주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갔다. 북송시대에 약 300여명의 사신이 등주를 거쳐 개봉으로 갔다. AD 1042년에는 수군 300명이 이곳에 주둔하며 거란의 해상침입을 방어했다. 당시에 송의 주력함대가 도어(刀魚)와 흡사했으므로, 선박을 ‘도어강(刀魚舡)’, 수군을 ‘도어순검’, 군항을 ‘도어채’라고 불렀다. 북송 중엽 이후 요와 금이 잇달아 송을 침공하자 경제적 중심지가 남쪽으로 이동했다. 고대 항만의 변천상황과 역사적 기록에 의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당송시대에 단애산을 기점으로 항만시설을 수축했다. 군함이 정박하게 되자 북동풍을 막기 위해 동쪽에 제방을 쌓았다. 도어채는 활 모양의 무역항과 군사기지로 병용됐다. 원대에도 수군요새를 구축했다. 원말명초에 해안선을 따라 왜구가 침범하자 1376년 명조정은 도어채의 수문을 열고 바닷물을 직접 소해로 끌어들여 토성인 ‘비왜성(備倭城)’을 쌓았다. 그것이 오늘날 수성이다. 1596년, 토성의 담장을 벽돌로 쌓고 동, 서, 북면에 포대를 설치했다. 수문을 만들자 물길이 생겨 남쪽과 동쪽에서 바다로 출입하게 됐다. 중국에서 유일한 해군요새가 생겼다. 이렇게 구축된 해군요새는 산동반도 연안을 지키면서 해운업을 원활하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군사적 목적과 경제적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연적 지세를 이용해 공수 양면의 우세를 차지할 수 있도록 설계했지만 근대에 산동반도는 열강의 안마당으로 변했다. 시설이 나라를 지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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