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정치적으로 큰 인물은 역사를 좋아한다. 여러 가지의 역사적 사건에는 반드시 자기에게 필요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를 활용해 자신의 정치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가 있었다. 자기에게 불리한 사례나 타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 있으면, 미리 다른 유사한 사례를 통해 곤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기도 한다. 또한 정책적 실패사례를 찾아내서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하고 그중에서 적절한 해결방법을 찾기도 한다. 대부분의 소인들은 역사에 대한 인식이 그렇지 못하다. 학교를 다닐 때 고작 역사교과서만을 뒤적였든지 아니면 역사는 자기와 무관하다고 생각한 탓이다. 관심이 있더라도 사소한 자료를 잠깐씩 훑어보는 정도였으면 역사적 고사(故事)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연인 것 같지만 사람의 이름에는 그의 인생이 들어있다.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이름은 주역(周易)과 무관하지 않다. 뇌지예괘(雷地豫卦) 육이효(六二爻)의 효사(爻辭)는 ‘개어석(介於石), 부종일(不終日), 정길(貞吉)’이며, 소상(小象)에서는 ‘부종일(不終日), 정길(貞吉), 이중정야(以中正也)’이다. 효사는 강직함이 돌과 같아서 단 하루도 주저하지 않고 정도를 지키니 진정으로 상서롭다는 뜻이다. 소상은 그렇게 하려면 중앙을 차지하여 바르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예괘는 우뢰가 대지를 내리치는 것처럼 어지러운 천하를 무력으로 평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석은 자(字)이고 원명은 중정(中正)이었는데 국부인 손중산이 사망한 후 자를 이름으로 대신했다. 중정과 개석은 모두 예괘에서 유래됐다. 손중산을 만난 그는 중정이라는 이름이 구오효인 지존을 의미하므로 개석이라는 이름을 덧붙여 자신의 이름이 구오효가 아니라 육이효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혔다. 장개석이 손중산의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개석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탓으로 예괘의 육이효가 변하여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모택동(毛澤東)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모택동이 오효에 해당한 것도 주역에 예시되어 있을까? 장개석이 중국을 몇 십 년 통치한 후에 모택동이 이어받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도 주역에 들어 있다. 예괘의 다음 괘인 택뢰수괘(澤雷隨卦)이다. 신기하게도 모택동의 이름자 하나가 떠오른다. 수괘의 괘사는 ‘원형(元亨), 이정(利貞), 무구(無咎)’이다. 크게 형통하려면 이익을 바르게 분배해야 잘못이 없다는 뜻이다. 예괘가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하는 것을 가리킨다면 수괘는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동화를 통한 평화를 건설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던 모택동과 적합하다. 그 다음 괘인 산풍고괘(山風蠱卦)를 살펴보자. 산은 간괘(艮卦☶)이고 어린 아들인 소남(小男)을 가리킨다. 풍은 손괘(巽卦☴)이며 평안하고 순탄한 것을 가리킨다. 간괘에서 소(小), 손괘에서 평(平)이라는 글자를 유추하여 등(鄧)이라는 성을 더하면 중국의 모택동의 폐쇄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개혁개방으로 바꾼 등소평의 이름이 나타난다. 현대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예괘에서 수괘로 다시 고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차례로 그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견강부회한 것 같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선을 앞으로 돌려보자, 예괘의 앞은 지산겸괘(地山謙卦)이다. 지는 곤괘(坤卦☷)이고 곤은 문(文)을 가리킨다. 또 하괘인 간괘는 산을 가리키므로 현대 중국의 국부인 손중산의 이름을 유추할 수 있다. 손문, 순중산, 손일선(孫逸仙)은 모두 그를 부르는 호칭이다. 신해혁명의 성공 이후 대총통의 자리를 원세개(袁世凱)에게 양보한 것은 그가 겸괘의 덕성을 타고 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호칭을 문산(文山)으로 정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까? 적어도 3천여년 전에 형성된 주역에서 중국의 현대사를 유추해보는 것은 단순한 흥밋거리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것이 공부의 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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