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성서원 현가루 ⓒ천지일보(뉴스천지)

최치원 등 7분 위패 모셔
47개 서원 중 전북서 유일
‘서원철폐령’ 속 살아남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살랑살랑’ 가을 향기 불어오던 지난달 23일. 산들바람은 발걸음을 전북 정읍 ‘무성서원’으로 이끌었다. 소박한 건물, 부드러운 기와곡선. 이곳 무성서원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사적 제166호인 정읍무성서원은 신라 말 유학자인 고운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태산군수를 지낸 최치원 선생은 백성들을 강학하는 등 재당시절 자신이 체득한 우수한 문화를 이 고장에 전파했다. 또 그는 유상곡수와 한시문학, 유학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군수로 떠나게 된다.

이 고장 주민들은 그를 계속 흠모해 월연대(月延臺, 현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의 서쪽 능선)에 생사당(生祠堂, 생존하고 있는 사람을 모시는 당)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 부르게 됐는데, 이게 시초였다.

그 후 유림들이 서원을 세웠고, 1696년 숙종 때 나라에서 무성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현 건물은 헌종 10년(1844)에 다시 고친 것이다.

또한 이곳은 최치원 선생을 포함해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김관 등을 배향했다.

▲ 사당 안 최치원 영정 ⓒ천지일보(뉴스천지)

◆전북 유일 서원

무성서원의 역사적 가치는 상당했다. 김명주 문화관광해설사는 “이곳은 고종 5년(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곳”이라며 “47개 서원 중 하나로, 전북 유일의 서원”이라고 설명했다. 또 최익현 등이 의병을 일으킨 거점이었다.

무성서원은 2층 문루인 현가루와 강당, 강수재 등 건물이 예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참배객 명단인 봉심안(奉審案), 서원의 규약집인 원규(院規) 등 귀중한 서원연구 자료도 보관돼 있다.

그 가치로 인해 제법 콧대가 높을 법도 하지만, 이곳은 위세라곤 단 1%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소박함이 오히려 ‘이것이 진정한 서원’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었다.

팔각지붕으로 된 현가루에 들어서자 강학공간으로 사용된 강당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1475년 불우헌 정극인이 향약을 창설하면서 세워진 향학당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1615년(광해군7)에 태산서원이 창건되면서 지금과 규모, 형태는 다르지만 강당 역할을 하는 상사가 있었다. 1825년(순조25)에 강당이 큰불로 소실된 후 1828년(순조28)에 중건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당은 가운데 3칸의 마루 앞뒤가 트인 게 특징이다.

시원한 강당 마루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니 현판들이 빼곡했다. ‘솔솔’ 부는 가을바람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글을 읽고 공부하는 선조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아른’ 그려졌다.

김 해설사는 “무성서원의 기운이 매우 좋다. 단종(조선 제6대 왕)의 부인인 정순왕후도 이 고장에서 났다. 무성서원에 30분 앉아가면 1년이 무탈하다”며 웃음을 주기도 했다.

▲ 무성서원 강당 ⓒ천지일보(뉴스천지)

◆제향공간, 7현 모셔

강당 뒤편에는 제향공간의 시작인 내삼문이 있었다. 태극모양이 그려진 내삼문의 높이는 제법 낮았다. 몸을 낮춰 들어가야 하듯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조심스레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서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인 사당(태산사)이 살포시 모습을 드러냈다.

최치원 선생을 비롯해 7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은 고려 말 훼철됐다가 14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으며 여러 차례 중수됐고 지금의 건물은 1844년에 세운 것이다.

이곳의 최치원 선생의 영정은 1784년 쌍계사로부터 모셔왔다. 무성서원 향사는 매년 2월 중정일(中丁日)과 8월 중정일에 지냈으나, 현재는 2월 중정일에 한 번 지내고 있다.

곧 울긋불긋 가을빛을 머금을 것 같은 무성서원. 최치원 선생의 숨결은 계절이 바뀌어도 언제나 계속될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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