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9월 15일 휘트니 육군준장,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 알먼드 육군소장이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월미도 스캔한 ‘X-RAY 작전’
병력·배치·지형 등 샅샅이 조사
美정보국 통해 맥아더에게 송신
붙잡히자 작전 탄로 우려해 자결

적진에 침투한 비밀 부대 ‘켈로’
인민군·민간인 위장해 임무 수행
비정규군인, 유공자 인정 못받아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인천상륙작전이 1950년 9월 9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최종 승인됐다.

인천상륙에 앞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천지역에 대한 정보수집이다. 항공이나 통신장비를 이용한 정보가 아닌 수로, 해안조건, 방파제, 북한군 등에 대해 사람이 직접 가서 보고 듣고 확인해야 하는 정보가 필요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대북 첩보작전 ‘X-RAY’를 수행하기 위해 첩보부대를 파견한다. 이는 영화 ‘인천상륙작전(감독 이재한)’의 모티브가 된 부분이다.

◆“적의 정보를 수집하라”… ‘X-RAY’ 작전

언어의 장벽과 현지 지리를 고려한 맥아더 장군은 대한민국 해군정보국에 첩보작전 일명 ‘X-RAY’ 작전을 일임했다. 영화에서 이정재가 해군 첩보부대 리더 장학수 대위 역을 맡아 활약했다.

실제로 1950년 8월 지시를 받은 해군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은 임병래 중위, 등을 포함한 사병 6명과 민간인 7명, 비밀리에 선발한 요원까지 총 17명의 인원으로 작전에 돌입한다. 이들은 각자 머리카락과 손톱·발톱을 깎아 남겨두는 등 죽음을 각오하고 극비리에 부산항을 출발한다.

▲ 유엔군함이 인천항으로 돌진하고 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영흥도에 내린 해군첩보대는 즉시 첩보활동을 시작한다. 3개 조로 분리된 첩보대는 인천과 수원, 서울 근교까지 잠입해 인천 해안포대의 위치, 병력, 배치, 규모, 화력, 상륙지점 지형 등 세세한 정보를 수집한다. 또 월미도에 잠입해 북한군관 2명을 납치한 후 북한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수집된 정보들은 9월 1일 영종도에 도착한 미군 정보국에 전달돼 맥아더 장군에게 송신됐다. 이를 바탕으로 맥아더 장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실시하기로 하고 14일에 ‘모두 철수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14일 새벽 영흥도에 3개조가 모두 서둘러 집결했다. 그때 뒷정리를 위해 남았던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 등 일부 대원들이 갑자기 잠입한 북한 1개 대대의 기습공격을 받게 된다. 반격을 시도했으나 수적으로 열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임 중위와 홍 하사는 나머지 대원들의 탈출을 돕고 항전하다 끝내 북한군에 포위된다. 인천상륙작전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24시간. 홍 하사는 M1 소총으로 적을 사살하다가 마지막 한발이 남자 자신이 포로로 잡혀 군사기밀이 유출될까 우려해 자결했고, 임병래 중위도 작전이 탄로 날까 두려워 45구경의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반드시 등대를 밝혀라”… 켈로부대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언급되는 KLO(Korea Liaison Office)부대는 미국 극동군사령부 직할로 조직된 특수비밀첩보 부대로, 한국어 발음에 따라 켈로부대로 불린다. 이들은 군번과 계급이 없는 비정규군으로서 6.25전쟁 중 적진에 침투해 첩보 수집 및 후방 교란 등의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영화에선 배우 정준호가 켈로부대 인천지역 대장 서진철 역을 맡아 작전에 투입된다. 켈로부대는 고트(Goat)·선(Sun)·위스키(Whiskey)·이글(Eagle)·불도그(Bulldog)·리바이벌(Revival)·파인애플(Pineapple) 등 10여 개의 독립된 지대로 구성됐다. 창설 당시 부대원들은 북한 출신들로 채워졌으나 6.25전쟁 중에 사망자와 실종자가 늘면서 남한 출신도 모집됐다. 전체 대원 가운데 약 20%는 여성이었으며, 인민군·중공군·민간인 등으로 위장해 임무를 수행했다.

부대원들은 전쟁 중 60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생존자는 2000∼3000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식 군번을 받은 정규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명용사로 전해오다 1995년 ‘참전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뒤늦게 참전유공자로 인정됐다. 그럼에도 비정규 특수군인인 켈로부대원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상당수가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 인천상륙작전을 막 마치고 부두에서 정비하는 모습. (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15일 0시까지 팔미도 등대를 밝혀라!”

인천상륙작전 당시 켈로부대는 어민으로 가장해 북한군이 설치한 기뢰를 찾아내고 연합군 군함이 무사히 인천만에 진입할 수 있도록 바다의 상태와 항로의 수심을 측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 작전 몇 시간을 앞둔 14일 밤 인천만 전체를 볼 수 있는 팔미도의 등대를 밝혀야 했다. 고트 최규봉 지대장을 포함한 한국 측 3명과 미국 측 3명의 특공조는 격전을 벌인 끝에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팔미도 등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연료탱크와 등불 받침을 연결하는 부품이 사라져 등댓불을 켤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실의에 빠진 대원들은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극적으로 나사못을 발견했다. 드디어 디데이(d-day)인 9월 15일에 등댓불을 밝혔고 맥아더 장군은 연합함대 261척에 진격 명령을 내린다. 15일 새벽 맥아더 장군을 주측으로 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단숨에 인천을 점령하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다.

마침내 성공확률이 1/5000로 낮았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다. 그 바탕에는 맥아더 장군의 결단력도 있었지만 이처럼 군인과 시민 등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바친 희생이 있었다. 이들은 앞으로 한국을 살아갈 후대의 미래를 위해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임무를 수행했고, 그 뚝심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살아온 터전, 누리는 자유는 피·땀 흘린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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