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해안 상륙에 상륙한 한국해병대와 유엔군.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작전명 ‘크로마이트’
인천 통해 서울 연이어 수복
보급로 끊어 자원 공급 차단
조수 차로 상륙시간 단 2시간
1/5000 확률로 기적적 성공

‘장사상륙작전’ 성공적
총 잡은 지 보름 된 학도명 772명
가진 건 3일치 식량과 총알뿐
동해안 국도 점거하고 적 교란
맥아더 “그대들 영원히 기억할 것”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배우 이정재, 이범수, 정준호에서 할리우드 스타 리암 니슨까지 출연해 화제를 모은 영화 ‘인천상륙작전(감독 이재한)’이 27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의 역사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숨겨진 영웅의 이야기를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다.

이 영화가 주목을 받는 것은 막강한 캐스팅 덕만은 아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인천상륙을 돕기 위해 비밀리에 대북 첩보활동을 펼치고, 인천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해군 첩보부대의 실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인천상륙작전하면 유엔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가장 먼저 생각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 외에도 수많은 한국군과 학도병들, 지역주민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올여름 묵직한 드라마와 긴박감 넘치는 전개, 장대한 볼거리로 관객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할 ‘인천상륙작전’의 역사 속 이야기를 알아보자.

▲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유엔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리암 니슨 분) 장군. (제공: CJ엔터테인먼트)

◆“인천에 상륙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제 탱크로 무장한 김일성의 부대는 38도 전역에서 기습 남침한다. 단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동쪽, 즉 마산 남부와 부산을 제외한 전 지역이 북한군 손에 들어간다.

이를 침략 전쟁으로 규정한 미국은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을 이끌고 부산항으로 들어간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판을 단번에 엎을 작전을 구상한다. 전면전을 생각했지만 아군의 피해가 클 것으로 생각한 맥아더 장군은 작전명 ‘크로마이트’ 즉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인천하고 가까운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수도를 회복해 적에게 심리적 타격감을 주겠다는 것이다. 또 서울로 연결된 모든 수로를 끊어버리면 북한군에 식량과 탄약 공급이 안 된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미국 해군과 합동참모본부는 반대한다. 인천의 수로가 너무 좁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유엔군 7만명을 태운 함정이 261척인데, 군함이 신속하게 이동하지 못하거나 북한군이 기뢰를 띄어놓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또 조수간만차로 인해 배에서 물자를 옮기고 군인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상륙시간이 단 2시간뿐이었다.

그럼에도 맥아더 장군은 성공확률이 1/5000인 이 작전을 추진한다.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2가지 작전을 시행한다.

맥아더 장군은 ‘9월 2일 원산폭격 예정’ ‘9월 19일 102척 함대 군산 집결’ ‘10월 14일 주문진으로 상륙하라’ 등의 거짓 무전을 적에게 흘리라고 지시한다. 어디에서 공격할지 예측할 수 없도록 혼란을 주기 위해서다.

▲ ‘작전 명령서 제174호’는 인천상륙작전 직전 후방 교란작전으로 감행된 장사상륙작전과 관련해 현재까지 확인된 공식 문건이다. 당시 희생된 ‘학도병’을 의미하는 ‘유격대’를 언급한 기록이 있어 매우 의미가 있다. (제공: 국가기록원)

◆학도병의 희생 ‘장사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시행 직전에 적의 시선을 끄는 작전을 펼쳐 병력을 상륙시키고 폭격을 가한다. 바로 ‘장사상륙작전’이다.

1950년 9월 13일 오후 부산항에 정박해 있는 전투함 문산호에는 앳된 학도병 772명이 탔다. ‘772 유격대’로 불렸지만 이들은 총을 쏘는 훈련을 보름밖에 받지 못한 중고등학생이었다. 부산을 출발한 문산호는 동해안의 작은 어촌 장사동(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으로 향하지만 태풍을 만나 배가 좌초된다. 학도병들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육지로 헤엄친다.

그들이 가진 것은 단 3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물, 건빵 한 봉지, 미숫가루 세 봉지)과 총알이 전부였다.

10시간의 고군분투 끝에 ‘772 유격대’는 당시 포항과 영천 방면을 잇는 동해안 국도를 점거하고, 적의 북상을 저지하는 전과를 올렸다. 북한은 대규모 상륙부대가 들이닥친 것으로 판단했고 북한군의 시선은 모두 동쪽으로 쏠렸다. 이 과정에 많은 인원이 전사했고 부상을 당했다. 살아남은 학도병은 구조작업을 통해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실행됐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맥아더 장군은 학도병들을 잊지 않았다. 772 유격동지회가 결성된다는 소식을 들은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귀하의 동지들이 수행한 전투는 혁혁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한 것”이라며 “772 유격대 동지들이 보여준 용맹과 희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영원히 빛나는 귀감이 될 것…. 저는 그들을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전우로서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서한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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