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진나라 호해 황제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초나라 진승과 오광은 차츰 그 세력을 넓혀 나갔다. 진승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장초(張楚)라 했다. 그리고 오광을 임시의 왕으로 내세워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나아가 형양을 공격했다. 위나라 쪽은 그곳 출신인 주시를 보내 평정하게 했다. 

오광은 형양을 포위했으나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했다. 승상 이사의 아들 이유가 삼천군의 군수로 있어 방비를 굳건히 하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왕 진승은 국내의 힘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협의한 끝에 상채의 방군인 채사를 상주국(재상)으로 임명하고 국가의 체제를 굳히게 했다. 

그곳에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주장이라는 현명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나라에서도 평판이 높아 향연의 궁중에서는 시일(일시의 길흉을 점치는 관리)을 맡았었고 춘신군을 섬긴 적이 있었다. 

그는 군사에 밝다고 자부하였으므로 진승은 그에게 장군의 인수를 주고 서쪽으로 곧장 나아가 진나라를 치라고 명령했다. 

주장이 행군하는 중간마다 병력을 늘리며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는 병거 1천, 병졸 수십만 명으로 불어났다. 단숨에 함곡관을 넘어서 희에 진을 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진나라에서는 소부의 장한이 장군이 되어 역산의 죄수와 노예들로 구성된 혼성 부대를 이끌고 나와 초나라 주장 군사를 맞아 싸웠다. 

싸움의 결과는 진나라의 완전한 승리로 돌아갔다. 패한 주장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함곡관을 빠져 나와서는 조양에 이르러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포진했다. 그러나 겨우 3개월 정도 지탱했을 뿐이고 추격해 오는 장한의 군사에 쫓겨 면지까지 도망쳤다. 그곳에서도 10여일 동안 겨우 버티다가 장한의 맹공격을 받아 패주하고 말았다. 주장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고 초나라군은 전의를 잃고 말았다. 

초나라 진왕의 명령으로 조나라를 평정한 무신은 한단에 들어가자 초왕 진승의 허락도 없이 조왕이라 일컫고 진여를 대장군에 장이, 소소를 좌우 승상에 임명했다. 그 소식을 들은 진승은 대노하여 무신 등의 가족을 잡아 처벌하려고 했다. 그때 상주국(재상) 채사가 만류했다. 

“진나라를 아직 무찌르지 못한 터에 조왕이나 그 가족을 죽인다는 것은 적을 또 하나 새로 만드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차라리 승인해 주는 것이 이로울 것입니다.”

그 말에 따라 진승은 사신을 보내 조왕 무신의 즉위를 축하하고 무신의 가족을 궁궐로 맞아들였다. 그렇게 한 뒤 진왕은 조왕 무신에게 즉시 함곡관으로 쳐들어갈 것을 독촉했다. 

조왕은 휘하의 대신들과 장군들을 불러 머리를 맞대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우리 조왕이 즉위한 것을 초나라 진승은 결코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다. 진나라를 친 후에는 반드시 군사를 이쪽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서쪽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남쪽으로 나가는 것이 이로울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남쪽은 황하를 경계로 하고 북쪽으로 연과 대를 차지하면 비록 초나라가 진나라를 정벌한 다음이라도 우리 조나라를 제압하려 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일 진나라를 토벌하지 못한다면 싫건 좋건 우리 조나라를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진나라의 약세에 편승할 수만 있다면 우리 조나라가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조왕 무신은 그 의견을 받아들여 서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중지하고 상곡으로 나아가 북쪽의 연나라를 평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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