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가장 큰 강점은 각 주체 간에 이견을 좁혀가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비교적 공정하다는 점이다. 비록 비용이 많이 들고 때론 적잖은 갈등이 불거지기도 하지만 결국은 최악을 피하기 위해 모두가 노력한다. 이런 모습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한 발씩 양보하면서 어떤 절충점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존속할 수 있는 생명력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정치권에서 벌어진 선거법 협상 과정을 보면 한마디로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은 여전히 기대치 이하라는 점이다. 먼저 여야를 막론하고 당리당략과 꼼수가 판을 친다. 사실상 여야가 담함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서로 약속을 어기거나 법률을 위반하는 일도 다반사다. 심지어 서로 합의했던 사안마저 돌아서면 서로 해석이 다르다. 이래서야 어떻게 대화를 하고 협상에 나서겠는가.

선거구 획정을 비롯한 선거법 협상은 ‘게임의 룰’을 정하는 문제다. 총선을 앞두고 가장 시급하고 가장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다. 협상 결과에 따라 여야 간에 그리고 같은 당 내부에서도 도시와 농촌, 대지역과 소지역 등의 유불리가 크게 달라진다. 특히 현역 의원과 정치 신인의 유불리는 이루 말로 다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협상보다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임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칼자루를 쥐고 있던 여야 기득권 세력은 느긋했다. 심지어 새누리당은 다른 쟁점법안과 연계하기도 했다. 시간이 없다고, 법률을 위반하고 있다고 아무리 외쳐봤자 소용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선거법이 처리됐다. 그러나 그뿐이다. 무려 62일 동안의 선거구 공백 사태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거의 없었다. 물론 어떤 대안도 나오지 않았다. 여야가 철저하게 담합한 것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총선체제로 들어가면서 다시 공천과 패권을 놓고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다. 한국정치가 언제까지 이런 모습이어야 하는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여야는 지금 이 시간에도 ‘변화’와 ‘혁신’을 외치고 있다. 듣기조차 민망한 일이다. 매번 선거 때만 되면 반복되는 이러한 양당의 담합 체제, 정치적 기득권 세력의 ‘갑질’을 언제까지 방치해 둘 것인가. 이번에도 또 알면서 속을 것인가. 대안이 없으니 이번에도 포기하겠다는 유권자들이 많이 나올까봐 참으로 두렵다. 한바탕 쇼가 끝나고 나면 알 것이다. 누가 유권자들을 또 속였는지를 말이다. 지금부터라도 변화와 혁신,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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